두샘의 덕수궁 탐방 11 대한제국의 자존심인 환구단과 황궁우 그럴까?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7/05 [16:33]

두샘의 덕수궁 탐방 11 대한제국의 자존심인 환구단과 황궁우 그럴까?

정흥교 | 입력 : 2021/07/05 [16:33]

 

 

중고등학교에서 환구단이나 황궁우에 대해 배웠으리라. 배웠겠지만 명칭에 대해 한번 따라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것 같다. 교과서와 학습교재에 소개되는 우리 역사는 그보다 곰과 호랑이, 마늘과 쑥이 등장하는 건국신화로 시작한다. 고조선 건국의 단군신화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내려온 전설을 고려말 일연 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에 소개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고조선 건국의 단군신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알고 있었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언급되지 않았다고 배우면서도

 

1955년부터 전국체육대회의 성화가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에서 채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부활한 개천대제는 매년 양력 103일 개천절에 거행되고 있다. 이는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함께 모신 이후로 단군은 명실상부한 국조(國祖)가 되었다.

 

한반도에서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고대사회로부터 하늘에 직접 제사를 올렸다.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국가적인 제천의례 행사였던 것으로 전해 온다.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 제천의례의 시작이었다.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高句麗)의 동맹(東盟), ()의 무천(舞天), 마한(馬韓)의 시월제(十月祭), 백제(百濟)의 교천(郊天), 고려(高麗)의 팔관회(八關會) 등은 모두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진 제천의례들이었다.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에 이들 국가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마시고 노래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의례이면서 동시에 축제의 형태로 진행된 것이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1.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9pixel, 세로 264pixel

환구단 주변

 

세조 2년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 환구단(圜丘壇 : 장소 다른 곳)을 다시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세조 10년의 제사를 끝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고(명나라와 청나라), 제후국인 조선은 그러한 권한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 유학자들과 사림의 주장에 환구단과 소격서가 차례로 없어졌다고 한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2.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2pixel, 세로 234pixel

대한제국에서 제사를 모시던 환구단(황금색 지붕의 건물)과 신위를 모시던 황궁우

 

환구단을 또다시 설치한 것은 고종 34,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다. 지금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만 남아있다. 1899년에 건축된 황궁우는 3층의 8각 건물이다.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며 화려한 용무늬를 조각하였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려 황궁우만 남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서울 시청역은 전철 1호선과 2호선, 버스가 환승 되는 곳으로 서울 강북의 여러 곳을 갈 수 있어 서울에 가면 자주 거쳐 가는 곳이었다. 고층빌딩 사이에 겸연쩍게 조금 고개를 내민 저 한옥은 무엇일까? 20여 년 전부터 궁금했지만, 매번 만남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서울시청에 근무하던 초등학교 때 동창이 초대하여 남대문부터 유적을 안내할 때도 살짝 얼굴을 내민 기와 건물을 설명했지만, 다음에 오면 제일 먼저 둘러보겠다고 스스로 한 다짐만 생각나고 2020년까진 다음에로 미뤄왔다.

 

창덕궁을 가기 위해 버스 172번을 갈아타려다 시청광장 정류장에서 환구단과 마주쳤다. 아니 환구단 석북 게시판만 사진을 찍고 버스를 탔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면서 여기가 어디지? 한동안 헤맸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1e300009.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96pixel, 세로 184pixel

환구단 시민광장 안내 게시판 사진 (1907년 추정)

 

1897(광무 원년)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을 앞두고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쌓았다. 1011일 고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황제에 즉위했다. 일제는 19112월에 환구단의 건물과 땅을 총독부 소관으로 한 다음, 1914년 환구단을 헐고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조선호텔)을 지었다. 지금은 단의 북쪽 모퉁이에 있었던 팔각정 형태의 황궁우만이 남아있다. (위의 사진 중앙 게시 안내글)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3.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3pixel, 세로 280pixel

환구단 시민광장의 안내 사진을 202051일 찍고도 여기가 어딘지 몰라 헤매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정면에 프라자호텔이 있고, 프라자호텔과 프레지던트호텔 사이 고층빌딩 사이로 왜소해 보이는 세 쪽의 문이 고종황제의 야심작 환구단 정문이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4.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81pixel, 세로 286pixel

환구단 정문

 

환구단 정문 / 지정번호 : 비지정

대한제국(1897~1910) 초기 환구단 시설을 건설하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시설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당시 황궁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맞은편 남별궁 터에 세웠다. 환구단의 전체 시설은 제를 올리는 환구단과 천신의 위패를 모시는 황궁우 그리고 그 주변 시설로 어재실, 향대청, 석고각 등을 갖추었으나 현재 황궁우와 석고각 안에 있던 돌북만 남아있다.

 

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 변에 있었는데, 1960년대 말 철거된 뒤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했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던 문이 원래 환구단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문의 이전 복원을 논의했다. 여러 후보지 가운데 좀 더 많은 시민이 환구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쉽게 접근하도록 서울광장, 덕수궁과 마주 보는 환구단 시민광장으로 자리를 정했다. 건물은 정면 3, 측면 2칸의 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측 칸을 좁게 조정했다. 기둥 위에는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활용한 점도 특별하다. (환구단 앞 안내 게시판)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5.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9pixel, 세로 284pixel

환구단 정문

 

환구단 정문 오른쪽 옆길로 계단을 오르면 황궁우가 있고 웨스틴조선호텔의 뒷문이 된다. 저 길이 환구단 가는 길이라고 안내는커녕 밖의 철제 울타리가 길이 없다는 무언의 느낌을 준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6.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8pixel, 세로 283pixel

환구단 정문 안에서 밖인 서울시청 광장을 바라본 풍경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7.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84pixel, 세로 288pixel

환구단 정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위로 올라가는 Y자형 계단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8.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84pixel, 세로 512pixel

환구단 안내 게시판

 

사적 제157/ 시대 1897(광무 원년) /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1

환구단(圜丘壇)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황단(皇壇) 또는 원구단, 원단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에는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는데, 고종(高宗 : 1852~1919)1897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환구단을 건설하였다. 1897(광무 원년) 10월에 완공된 환구단은 당시 왕실 최고의 도편수였던 심의석(沈宜碩 : 1854~1924)이 설계하였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 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 황궁우(皇穹宇), 돌로 만든 북(石鼓)과 문 등으로 되어있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a30.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85pixel, 세로 336pixel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6540016.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84pixel, 세로 275pixel

환구단 추정 배치도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6540018.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4pixel, 세로 280pixel

황궁우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9.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4pixel, 세로 281pixel

석고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a.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8pixel, 세로 283pixel

석고

 

석고는 광무 6년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조형물이다.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 용무늬는 조선조 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서 당시 최고의 조각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b.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7pixel, 세로 282pixel

협문

 

당시 황궁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맞은편,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터에 세웠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 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철도호텔(조선호텔)을 지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c.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5pixel, 세로 500pixel

환구단 정문에서 올라오며 마주친 황궁우, 우측으로 가면 석고와 협문이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d.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6pixel, 세로 282pixel

황궁우-환구단 안에 하늘과 땅의 모든 신령의 위패를 모신 곳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e.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6pixel, 세로 282pixel

삼문과 조선호텔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0f.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9pixel, 세로 505pixel

삼문과 조선호텔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10.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81pixel, 세로 286pixel

조선호텔(좌측)과 황궁우로 향하는 삼문(우측)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38540009.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9pixel, 세로 284pixel

석수와 쌍룡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11.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5pixel, 세로 281pixel

쌍룡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12.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7pixel, 세로 283pixel

좌측 조선호텔, 우측 황궁우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13.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7pixel, 세로 282pixel

삼문 중 가운데 문 천장화 (양쪽 문에도 그림이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14.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8pixel, 세로 284pixel

환구단 난간석 석물 유적

 

환구단 난간석 석물 유적. 환구단 난간석 석물은 고종이 천지에 고유제를 지낸 후, 18971012일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곳인 환구단의 3개 층의 원형 난간석 중 한 부분이다. 이 석재는 1913~1914년 조선총독부철도 호텔을 지으면서 환구단을 헐면서 남게 된 석물로 황궁우의 정문이자 환구단과 황궁우를 잇는 문에 해당하는 전벽돌로 지은 삼문의 난간 석재로 사용하였다. 2019년 삼문 주변의 직선 담장을 복원하면서 다시 헐고 현 위치에 보관하고 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를 지낸 환구단의 역사적 실체라 할 수 있다. (환구단 난간석 석물 유적 안내문)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15.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6pixel, 세로 282pixel

협문(잠겨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16.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8pixel, 세로 283pixel

올라오는 곳 또는 내려가는 곳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17.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78pixel, 세로 284pixel

2021428일 프레지던트호텔 주차장 골목으로 들어와 계단을 밟고 환구단에 올랐다. 안내 표지판도 환구단이 아닌 원구단이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4e940019.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83pixel, 세로 287pixel

다시 바라본 황궁우

 

1897년 완공된 환구단은 당시 황실 최고의 도편수였던 심의석이 설계했다. 원뿔꼴의 황금빛 지붕에 바닥이 3단으로 지어졌던 환구단은 아랫단이 43.2m이며 윗단은 하늘과 땅, 가운데는 일월성신, 아랫단은 산천 및 자연신을 위계에 맞게 모셨다. 해를 가리키는 대명지신의 위패는 동쪽에, 달을 가리키는 야명지신의 위패는 서쪽에 모셨다. 그리고 고종은 연호를 사용함으로 자신이 시간을 다스리는 존재임을 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인간은 땅을 선택하여 자신들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으나 하늘()의 영역인 시간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천자(天子)인 황제는 천단을 쌓고 연호를 사용함으로 하늘과 소통을 하고 시간을 다스리는 존재임을 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1914년 환구단을 양도받은 조선총독부는 환구단을 철거하고 조선철도호텔을 건립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으며 6.25 전쟁 때는 인민군 사령부로, 전쟁 끝나고 미군 숙소로 사용되다가 1961년 미군으로부터 환수하였으나 1968년 소실되어 한국관광공사가 다시 조선호텔 신축했으나 신세계로 넘어갔다.

 

철거될 당시 환구단을 비롯하여 정문, 향대청, 어재실, 황궁우, 동서무, 전사청, 석고각, 광선문 등의 많은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1927년 먼저 석고각의 정문으로 이용되던 광선문이 남산에 있는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의 정문으로 옮겨지더니 그로부터 8년 뒤인 1935년 석고각마저 이등박문을 추모하는 사찰인 박문사의 종루로 이용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선조는 압록강을 넘어가려 이를 갈고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동안 황제의 꿈

하늘에 제사만 올리면 왜놈들 땅 꺼지나

 

숭례문은 문화재청 국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소속이고 환구단은 중구청 소속이다. 대한제국이 둘로 나뉜 느낌이다. 근처에 사신다는 60대 초반의 노신사를 만났는데 대뜸 하시는 말이 기우제 지낼려고 만든 거예요. 이 안에 위패? 아무것도 없어요. 자신감 넘치는 큰소리에 인근 고층빌딩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궁궐 탐방은 일단 여기서 마칩니다. 그간 열렬히 읽으시며 박수를 보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