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샘의 덕수궁 탐방 5 만세(萬歲)와 만세(萬世) 왕국(王國)과 황국(皇國)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5/25 [21:31]

두샘의 덕수궁 탐방 5 만세(萬歲)와 만세(萬世) 왕국(王國)과 황국(皇國)

정흥교 | 입력 : 2021/05/25 [21:31]

 

 


I-9 만세(萬歲)가 만세(萬世)인가?

 

월대 위에 4개의 검은 무쇠솥은 '드므'인데, 화재를 막기 위한 방화수이다. 실제로 불을 끄기에 부족한 양이지만 화마가 왔다가 드므 속에 비친 자기의 흉악한 얼굴을 보고 놀라 도망가게 하려고 놓아둔 거란다. 그리고 한자로 '국태평만년(, , , , )' '희성수만세(, , , , )'라고 새겨져 있다. ‘나라가 태평하게 만년토록 오래 지속되라'는 의미와 성스러운 임금의 수명이 만년이나 오래 지속됨을 기뻐한다.‘라는 뜻이다. 만세(萬歲)가 만세(萬世)인가? 만세(萬世)가 만세(萬歲)인가?

 

 드므

 

 중화전

  

I-10 왕국(王國)과 황국(皇國) 차이는?

 

황제국 법전이 경운궁이기에 다른 궁궐과 차이점을 살펴보자.

첫 번째, 다른 궁궐의 답도에는 봉황인데 경운궁은 쌍용이 새겨져 있다.

두 번째, 경복궁에만 있던 ''이 경운궁에도 있다.

세 번째, 중화전 문창살의 색깔이 황제만 쓸 수 있는 황색이다.

네 번째, 드므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만세(萬歲)'라는 글자가 있다.

 

 법궁에서만 볼 수 있는 '()’


월대 위에 정전의 주춧돌과 기둥을 세우는 기단이 있고 이곳의 동서 모서리부에 커다란 청동 향로같이 생긴 항아리가 놓여 있다. ()이라고 부르는 이 물건(기기)은 원래 고기, 물고기, 곡물을 취사하는 토기로서 출현했지만, 동시에 종묘에 조상신을 모실 때 제물을 익히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청동기 정은 국가의 군주나 대신 등 권력의 상징으로 이용되었고 왕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정()은 세 개의 다리가 있어야 안정되기 때문에 삼정(三鼎)이라 부르기도 한다

 

 창덕궁 인정전의 문창살 색깔은?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경궁의 명정전의 문창살은 밝은 녹색이나 황제국의 문창살은 천원(天元)을 상징하는 황색이다. 그래서 경운궁 중화전의 문창살은 황색이다. 그렇다면 창덕궁 인정전의 색깔은 무엇인가? 이 또한 황색이다. 순종황제가 즉위 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  

 

 경운궁의 우물천장과 닫집에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 2마리가 장식되어 있다.


오조룡(五爪龍)은 발톱이 다섯 개 있다는 전설의 용이다. 용은 예로부터 천자(天子)나 국왕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왔기 때문에 조선시대 왕의 직계가족들은 용보를 부착하였으며 용의 발톱수로 신분을 구분했다. 즉 왕과 왕비는 오조룡(五爪龍), 왕세자와 세자빈은 사조룡(四爪龍), 왕세손과 세손빈은 삼조룡(三爪龍)의 보를 사용했다

 

 용상도 황색<사진>


낮은 월대를 지나 중화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경복궁의 칠조룡처럼 경운궁에는 오조룡이 있다.

 

천장에는 단청한지 오래되어 퇴색한 무늬의 단청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청룡과 황룡 두 마리의 용인 것 같다. 다른 궁들은 봉황이나 글자무늬 그리고 학이나 기러기 문양의 단청이 일반적인데 경운궁은 용이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모습으로 황제국의 위상을 나타낸다.

 

중화전의 문창살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황제의 상징인 황금색이고 중화전의 내부 어좌, 일월오봉도에서도 황금색이 보인다.

 

1907년 일제는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양위식은 이곳 중화전에서 열렸는데 황제의 자리를 양위하는 고종도,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는 순종도 없이 양위식을 거행했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한 내관은 고종을 대신해서, 다른 한 내관은 순종을 대신해 주인공이 없는 양위식을 강제로 거행했다. 이로써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순종은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등극하는 일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중화전이다.  

 

꼬마들도 어이없다

알나리깔나리

지나가는 강아지도

알나리깔나리

꼴값도 유분수란다

알나리깔나리  

 

순종황제는 고종황제를 경운궁에 남기고 창덕궁으로 옮기며 '경운궁'이 천수를 누리라는 의미인 '덕수궁'으로 바꾸었고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다.  

 

J-1 고종황제의 침실 함녕전

 

 덕홍전과 보물 제820호인 함녕전(咸寧殿)

  

중화전이나 석어당으로부터 좌측엔 두 개의 전각이 있다. 바로 옆이 덕홍전이고 다음 건물이 함녕전(咸寧殿)이다. 함녕(咸寧)모두()가 평안하다()’라는 뜻으로 주역(周易)만물에서 으뜸으로 나오니, 만국이 모두 평안하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단다. 우선 함녕전은 1897년 건립된 목조 건물로 고종황제의 침실이다. 광무 8(1904) 아궁이 수리공사 중 화재가 발생하여,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전각들이 대부분 타버렸다.  

 

일본 측의 자료에 의하면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 온돌을 수리하고 말리는 과정에서 아궁이의 불씨가 나무 기둥에 옮겨붙어 삽시간에 급한 북동풍을 타고 궁궐 전체로 번져 하늘이 새까맣게 변해버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단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점은 이곳에서 시작된 불씨로 그 넓은 경운궁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화재가 자연발화인 화재라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의도된 '방화'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경운궁 화재 후의 1904414일 곳곳에 연기가 피어나고 있는 모습(자료 : 현대사스토리텔러)

 

함녕전의 온돌 장치는 나무 기둥 사이에 한자 이상의 돌기둥이 버티고 서있는데 과열로 인해 나무 기둥까지 불이 옮겨붙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즉 이 화재는 고종을 위협하려는 의도로 일제의 사주로 저질렀던, 고의적인 방화라는 의혹이 더 짙다는 것이 후세 역사가들의 중론이기도 하다.

 

일본이 경운궁에 불을 지른 것으로 의심하는 책들도 많으나 당시 조선에 있던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가 매월 발행하던 The Korea Review에 화재 당시 상황이 쓰여있단다. 당시 함녕전은 온돌 수리 중이었다. 그래서 당시 고종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수리를 마친 후 젖은 온돌을 말리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땠는데 빨리 말리려고 불을 좀 과하게 피운 모양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북동풍이 심하게 불었다. 수리로 인해 아궁이 주변에 쌓여있던 톱밥에 불이 옮겨붙었고 새로 칠한 단청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불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주변 전각으로 옮겨붙었다. 당시 불이 워낙 크게 나서 경운궁 주변에 있는 각국 공사관들이 다 알 정도였다.

 

경운궁 인근 거의 모든 공사관에서 불을 끌 인력을 지원할 준비를 하고 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영국과 미국 공사관이 경운궁과 붙어있어 불을 끌 준비를 마치고 있었는데 경운궁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겪은 후라 궁에 불이 나더라도 이게 진짜 불인지 반역을 위해 궁궐 문을 열려고 일부러 낸 불인지 확인할 때까지는 그 누구도 문을 열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이 계속되자 고종은 결국 서쪽 평성문을 통해 지금의 중명전인 수옥헌으로 갔고 경운궁 내 사람들과 각국 공사관 인력까지 동원돼서 겨우 불길을 잡았다. 결국 경운궁은 지은지 2년 만에 폐허가 되었고 다시 지어야 했다.

 

지금 있는 함녕전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머문 곳으로 고종은 1919121일 승하했다.

 

 함녕전은 정면 9(대청 3칸 포함)

 

규모는 정면 9, 측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 모서리 부분에 잡상(조각)을 나열한 점은 침전 건축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구성이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과 장식적인 굴뚝을 설치하였다

 

 함녕전 어좌


일월오봉병 앞에 놓인 것은 다리가 X자로 접히는 이동식 어좌 용교의(龍交椅). 용교의 아래엔 왕의 평상 용평상을 받치고 왕의 돗자리 용문석을 깔았다. 모두 산뜻하고 색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데, 오봉병부터 용문석까지 모두 무형문화재급 장인들이 재연한 작품들이다.

 

덕홍전(德弘殿)은 함녕전이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으로 함녕전 서쪽에 있다. 정면 3, 측면 4칸의 겹처마(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용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1904년 함녕전의 아궁이 불로 경운궁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함녕전 일원(덕수궁 안내 책자)

 

 함녕전 행각

 

 함녕전 동쪽 온돌방과 행각은 복도 마루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궁궐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함녕전 복도


원래는 함녕전과 덕홍전은 복도로 이어져 있었는데 복도가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단다. 하지만 덕홍전에는 이 복도와 연결된 흔적이 남아있고 연결 부위에는 여닫이 판문이 있단다. 유일한 여닫이문이라 확인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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