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샘의 덕수궁 탐방 4 정전이 2개, 정문이 2개인 경운궁에 금천교는?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5/20 [01:54]

두샘의 덕수궁 탐방 4 정전이 2개, 정문이 2개인 경운궁에 금천교는?

정흥교 | 입력 : 2021/05/20 [01:54]

 

 

I-1 경운궁과 덕수궁은 하나?

 

임진왜란으로 의주(義州)까지 도망갔던 선조가 1593년 한양으로 돌아와 월산대군 후손이 살던 명례궁을 시어소(時御所 : 정릉동 행궁)로 삼았고 1611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기며 경운궁이라 불렀다. 1623년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즉조당과 부속 전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경운궁은 264년간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는 궁이었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을 법궁으로 대한제국을 수립하였으며 1907년 순종이 즉위하여 창덕궁으로 옮기며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명하였다. 1907년 법궁을 옮기기 전에는 경운궁, 옮긴 후에는 덕수궁이라 불렀다.   

 

I-2 즉조당이 정전일 때 정문과 금천은?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정전은 현재의 즉조당인 태극전을, 중문은 돈례문, 정문은 인화문(현재 중화문이 있는 곳으로 추정)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인화문과 돈례문 사이(지금의 중화문 마당)에 금천도 파고 금천교도 만들었다. 그 흔적은 정4품 품계석 근처로 추정하는데, 석판에 구멍이 9개 뚫린 배수구가 2곳에나 있다.

 

 4품 품계석 양쪽에서 안쪽으로 9개의 구멍이 있는 박석이 있다. 무심코 배수구 같은 데 금천이란다. 대한문 바로 안쪽의 금천과 또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중문과 침전, 편전 등을 지어 비로소 제대로 된 궁궐 형식을 갖추었다. 정릉동천을 경운궁 궁내로 끌어들여 금천으로 사용하는 정전 체제가 3년 동안 유지되었다. 금천교 밑을 흐르던 경운궁의 금천은 지금의 서울시청 앞쪽에서 창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갔다. 1900년경 경운궁은 일반 궁궐처럼 정문부터 정전까지 세 개의 문이 서 있었고, 행각으로 궁궐다운 모습이 완연했다.   

 

I-3 중화전이 정전일 때 정문과 금천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3년 동안 사용하였으나 너무 협소했다. 그래서 1901(광무 5)에서야 새로운 정전인 중화전을 즉조당 앞에 짓기 시작해 190210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인 중화전을 지었다. 1902년에 중화전이 건립된 이후 태극전이 즉조당으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경운궁 영역을 남쪽으로 크게 확장하면서 땅 부족으로 인화문을 헐고 사람들의 통행이 잦던 동쪽의 대안문을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대안문과 새 중화전 사이에 중문인 조원문을 190211월 만들었으며,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새롭게 금천을 파고 금천교를 놓았다. 이때 금천교 다리를 옮긴 것인지, 새로 만들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니 금천이 하나인지 두 개인지도 확실치 않다.

 

 경운궁 정전 체제 은 중화전 이전 금천이 흐르던 곳으로 는 조원문이 세워졌던 곳으로 추정한다. 즉조당과 중화전, 중화문은 일직선 위에 있다


이제 삼문은 중화문-조원문-대안문이고 삼조는 외조ㅡ치조ㅡ연조로 연속되는 세 개의 공간으로 삼문삼조의 격식을 갖추었으나 19044월 대화재로 중화전을 비롯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다시 건축을 시작해 중화문(中和門)과 조원문(朝元門) 등을 세웠다. 그리고 1906년 정전인 중화전(中和殿)2층이 아닌 단층 건물로 완성되었으며,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문으로 삼았다.

 

조선총독부는 대한문 앞 원활한 차량 통행을 위해 금천을 흙으로 덮어버렸다. 815 광복 후인 1986년에 발굴한 뒤 그 자리에 복원한 금천은 거북이 수영장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정말 발굴복원된 금천은 흉내만 냈기 때문에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대한문은 궁궐 안쪽으로 여러 차례 옮겨졌는데, 1971년에는 서쪽으로 33m(덕수궁 자료집)를 이전하였기 때문에 현재 대한문과 금천교가 거의 붙은 기괴한 모습이 되었다.

 

 대한문 앞 금천과 금천교


I-4 조선시대 품계

 

 중화문(中和門)과 중화전 사이의 삼도 가운데 길은 왕이 다니는 어도이고, 동쪽에는 문신, 서쪽에는 무신이 다닌다.

 

 조선의 관직은 문반 무반 양반제로 18품계인데 실제로는 30품계다. 과거에서 장원이면 종6품에서 시작했다. (인터넷 자료)


I-5 왕국과 황국은 두()끝 차이 

 

왕국과 황국의 차이는 두()끝이고

王國皇國의 차이는 백()끝이다

왜놈을 겨냥하면서도

대륙 향해 만만세

 

 중화전은 우리나라 역사 처음으로 '칭제건원'을 했던 대한제국의 중요한 법전이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 창경궁의 명정전(明政殿)처럼 법전에는 정()자를 붙이는데, 대한제국의 법전인 경운궁의 중화전(中和殿)은 정()자가 빠져있다. 경운궁의 정전은 이름 가운데 정()자를 쓰는 대신 화()자를 써서 중화전(中和殿)으로 불렸는데, 대한제국, 즉 황제의 나라를 선포한 상태에서 조성한 건물이기에 기존의 궁궐 개념이 아니라 황궁의 개념에서 지은 이름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을 의미한다.  

 

 개화기 당시 한성부 지도 경운궁 주위로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들이 보인다. 중앙 부분이 경운궁, 오른쪽 아래 부분이대한제국 선포 뒤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皇壇)단이다. (자료 https://munchon.tistory.com/1514[황보근영의 문촌수기])

 

 경운궁 주위로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들이 보인다.


I-6 이 건물의 용도는?

 

대한문에서 중화문 쪽으로 가다 보면 매점 같기도 하고 정자 같기도 한 건물이 있다. 그런데 1m 정도의 낮은 벽이 있고 천장 위에는 사방이 벽장으로 닫혀 있다. 지금은 관람객의 휴식 공간이 되었고, 비를 피하거나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중화문 바로 직전 건물은 무엇일까?

 

 조정에서 바라본 중화전 직전의 건물은 중화전의 행각 중 남아있는 일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에서 둘러보거나 밖에서 바라봐도 행각 같은 느낌은 전혀 안 든다. 지금은 오히려 관람객의 휴식 공간이 되어 지친 몸을 잠시 쉬어가는 곳이 되었다.

 

중화전 조정에서 봐도 낯선 풍광이다. 아파트 단지의 바비큐장 같다. 안내 글판을 보니 남아있는 경운궁 행각의 일부란다. 1902년 중화전을 건립할 때 중화문을 포함해 5개의 문과 128칸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04년 화재 후 다시 108칸으로 새로 지었는데,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일제는 중화전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을 이곳만 남겨두고 모두 헐어버렸단다. 따라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법전의 행각이 귀퉁이 조금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이제 경운궁의 법전은 누구나 들여다보고 문을 통하지 않아도 넘나들고 싶은 곳으로 거리낌 없이 바람처럼 들어왔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현존하는 행각은 1905년 중건된 행각의 일부란다.  

      

I-7 중화문과 중화전

 

 중화전과 중화전의 정문인 중화문(中和門)

 

 중화문 일원(덕수궁 자료집)

 

중화문은 190210월 처음 세워질 때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4월 화재로 재건되면서 정면 3,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축소되었다. 중화문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것도 철거되어 없어졌다. 1985년 중화전과 중화문이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조정에서 바라본 중화문과 품계석 그리고 삼도

 

박석이 깔린 넓은 공간을 조정이라 부르는데 조정은 조회가 있던 뜰이란 뜻이며 조정 가운데 삼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품계석이 있다.  

 

I-8 답도의 쌍용과 석수

 

중화문을 보면 문짝이 세 개다. 그중 가운데 문짝 아래를 보면 돌로 된 판 같은 게 가운데 하나, 양쪽에 두 개로 총 세 개가 있다. 가운데 중앙 판을 답도, 양쪽 판을 석수라고 한다. 석수는 정사를 행함에 있어 옳고 그름을 가려서 하라는 뜻을 가진 돌로 만든 짐승이다. 그런데 중앙 넓적 돌인 답도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물론 중화전에도 답도와 석수와 용이 있다.

 

 중화문 답도와 석수 그리고 쌍용

 

 중화문 답도에 두 마리 용

 

중화문의 답도에는 예전 궁궐에 봉황이 새겨져 있는 것과 달리 용이 새겨져 있고 양편에는 석수가 놓여 있어 중화전이 황궁의 정전임을 보여준다. 쌍용은 대한제국의 당당한 표시인데, 중국에 사대하는 제후국에서 이제 황제국이 되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중화전 답도와 석수 그리고 쌍용

 

 중화전 답도에 쌍용

 

 중화문 천장은 아름답게 단청으로 단장을 했다.


중화전은 처음에는 2단으로 조성된 월대(月臺) 위에 정면 5, 측면 4칸 중층지붕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졌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뒤 재건되면서 당시 어려운 국가 재정과 어지러운 국제 정세로 규모를 줄여 단층으로 건립하게 되었다. 이중 월대 위에 <중화전>을 세웠다. 여기서도 답도에 새겨진 두 마리 용이 있다. 석수에 새겨진 얼굴은 불을 잡는다는 상상의 동물 해치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