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샘의 덕수궁 탐방 3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며 궁궐이 공원으로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5/11 [22:54]

두샘의 덕수궁 탐방 3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며 궁궐이 공원으로

정흥교 | 입력 : 2021/05/11 [22:54]

 

 


E-9 만국평화회의

 

고종이 늘 서양세력과 청나라와 일본에 감시를 당하는 처지가 되면서 우리 현대사는 굴욕적이고 아픈 역사로 점철되어 갔다. 19076월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과 평리원 검사 출신 이준(李儁), 전 러시아 주재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을 은밀히 중명전으로 부른다. 고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릴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한국 특사들이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실정을 설명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내용의 친서를 보낸다.

 

그러나 일본 측의 방해 공작으로 실패했다. 네덜란드 정부와 평화회의 의장은 을사조약이 이미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은 이상 거론이 불가능하다며 회의 참가까지 거절했다. 그런데도 이위종은 79일 신문기자단 국제협회가 특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참석자들의 호응을 얻었고, 한국 입장에 동정하는 박수를 받았다. 이준 열사는 울분을 참지 못해 음식을 끊었고, 714일 순국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다 병사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군 포병 1개 중대는 남산에 6문의 대포를 설치해 경운궁과 종로를 겨냥했고, 보병 1개 연대는 경운궁을 포위해 고종을 무력으로 위협하였다. 고종은 군부대신 이병무와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위협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은 719일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대리청정을 양위로 바꾸어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F-1 순종 즉위로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바뀜

 

일본은 고종을 경운궁에 남겨놓고, 순종을 강제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는 대한제국의 법궁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순종황제는 폐위된 아버지 고종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경운궁이라는 궁궐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호를 태황제라 부르고 궁호를 덕수(德壽)라 정한 뒤, 경운궁을 덕수궁(德壽宮)이라 명명했다.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F-2 순종과 한일합병

 

1907724일 일본은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로 차관 정치가 시작되었으며, 81일에는 재정 부족을 이유로 남아있던 8,800명 정도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19108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고, 829일 순종은 일본국 황제에게 한국 통치권을 양도한다라는 조서를 내리며 조약을 공포했다.

 

 정면 계단 앞의 건물이 창덕궁 흥복헌(興福軒)으로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좌측은 대조전이다.

  

F-3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덕수궁 파괴

 

현재의 덕수궁은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파괴되어 본래의 크기에서 3분의 1로 축소된 형태란다. 당장 <대한문>부터 1914년 일제가 태평로를 건설하면서 뒤로 크게 물러났다. 본래의 자리는 현 시청 앞 잔디광장쯤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 후 1970년 이 길을 확장하면서 또다시 뒤로 물러나게 된 곳이 지금의 대한문 위치란다.

 

1910년 덕수궁 내에 서양식의 전각인 석조전이 완공되었고, 1912년에는 태평로(광화문로~남대문)가 개설되면서 덕수궁 동쪽 영역이 축소되었으며 중명전을 경성구락부(외교클럽)’의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3년에는 덕수궁 내에 구여당(전통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마지막 건물)이 건립되었고, 1916년에는 준명당에서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한 유치원을 운영하였다.

 

 덕수궁과 주변 대사관저 (자료 https://blog.naver.com/annejoey/222252895987)


1920년대 일제는 실로 가차 없이 덕수궁을 가로지르는 길을 내 버린다. 덕수궁을 절단낸 뒤 새로 지은 담이 바로 지금 우리가 찾는 정동 덕수궁 돌담길이다. 1925년 중명전이 화재로 전소되었고, 1933년 덕수궁을 공원으로 개조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그리고 석조전은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하여 일본 근대미술품을 전시했다. 그리고 1935년에는 돈덕전이 있던 자리에 동물원을 신설했으며, 1938년에 석조전 서관을 신축하여 석조전을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개관하였다. 또한 광명문을 현재 위치로 이동하였다.

 

궐내각사 일부와 환구단(1913)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이제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1920년부터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하여 궁역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1933년에는 많은 전각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G. 해방 후에서 현재까지

 

1945년 해방이 되자 석조전에서 해방기념문화대축전 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1946년에는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1947년에는 석조전에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1948년에는 석조전을 UN한국임시위원단 사무실로 625 이전까지 사용하였다.

 

1954년 한국전쟁으로 파손된 석조전을 한국 공병단이 수리하였고 1955년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1972년까지 사용했다. 1961년 대한문 옆 담장을 철거하고 철책을 설치하였다가 1968년 철책을 다시 철거하고 담장을 설치하며 덕수궁 안쪽으로 이전하여, 대한문이 도로 사이에 고립되었다.

 

1963년 덕수궁을 사적 124호로 지정하였으며 1971년 대한문을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다. 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불탔는데 보수하여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하다가 1992년에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탈바꿈하였다. 2010년 중명전을 복원한 후 전시관으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H. 즉조당 일원

 

 우측부터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 (출처 : 덕수궁 안내 책자)

  

덕수궁 중화전 바로 뒤에 덕수궁에서 유일한 2층 건물이 석어당이다. 석어당(昔御堂)은 선조 이전부터 있었던 유일한 건물이다. 월산대군과 그 후손들이 쓰던 집이었다. 조선시대 궁 안의 건물들이 밖에서 보기에는 2층인데 비해 안에서 보면 한 층으로 터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석어당은 실제로 2층이다. 그리고 건물 내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겪었던 고초를 가슴 아프게 기린다는 뜻이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환도하여 160821일에 56세의 나이로 석어당에서 16년간 머물다 세상을 떠났다. 1611년 광해군은 정릉동 행궁을 떠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궁호를 내렸다. 또한 석어당은 인목대비의 한과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왕위 정통성을 둘러싸고 심해진 당쟁으로 광해군은 계축옥사(1613년 광해군 5)로 영창대군(1614)을 죽이고 1618(광해군 10)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하였으며 서궁으로 낮추어 불렀다. 인조반정으로 끌려온 광해군에게 죄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내가 친히 그대의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하고 싶다며 인조에게 몸부림첬다.

 

 석어당

 

 2층 현판 글씨는 김성근이 쓴 것으로 전해온다.

 

 

석어당 내부 주련이 보인다.

海屋籌添壽八百(해옥주첨수일백) 瑤池桃熟歲三千(요지도숙세삼천)

수명은 800세인데 나이는 3,000세라며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석어당 바로 좌측에 즉조당이 있다. 즉조당(卽阼堂)은 왕의 즉위가 이루어졌다 해서 붙여졌다. 이곳에서 광해군이 1608년 즉위식을 했고 인조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즉위했다. 인조는 즉위한 직후 곧바로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며 선조의 침전 두 곳(즉조당과 석어당으로 추정)을 제외하고 경운궁(현 덕수궁)의 가옥이나 대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왼쪽부터 석조전, 준명당, 즉조당이다.

 

 즉조당 내부

 

 즉조당 편액은 고종의 어필 '光武 九年乙巳七月'이라고 적었다.


1769(영조 45) 영조는 인조가 즉위한 건물에 즉조당이란 이름을 붙였고, 1773(영조 49)에는 선조의 환어 3주갑을 맞아 즉조당에 현판을 써서 걸었다. 기록으로 석어당 명칭은 이때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즉조당은 선조가 서울로 돌아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조가 편전으로 쓰던 곳이다. 인조 이후에도 존재했던 2개의 건물 중 하나인데 1902년 중화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대한제국의 정전 역할을 했다. 1904년 화재 때 역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

 

즉조당 좌측에 준명당이 있다. 석어당과 즉조당은 선조가 머무를 때 있었으나 준명당은 1896년 건축된 것으로 추측한다. 다만 1904년 대화재 때 석어당, 즉조당과 함께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8월 현판을 걸어 중건하였고 한다. 준명당은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이었다.

 

 
즉조당 기둥에 주련 九天閶闔開宮殿(구천창합개궁전) 萬國衣冠拜冕旒(만국의관배면류) 구천의 큰 문이 이 궁전에서 열리니 만국의 사신들이 면류관에 절하네.

 

 즉조당과 준명당을 이어주는 운각(다락형의 복도)

 

 준명당(浚眀堂)의 준명(浚眀)은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가 신기하다. 보통의 밝을 자와 다르게 날 대신 눈 을 넣었다. 중명전의 명자도 같은데 '눈 밝을 명'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준명당(浚眀堂) 편액은 깨끗하네요. 밀려오는 외국 문물들에 대해 눈을 크게 뜨고 경계하자는 의미도 있다네요.


뒤도 반듯한 즉조당과 석어당과 달리 준명당의 뒤는 '' 자로 꺾여 있다. 주로 외국 사절을 만나던 공간으로 1897년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이기도 했다. 즉조당과 마찬가지로 화재 후 다시 지었다. 1904년 화재 후 복구하면서 단층이 된 중화전과는 달리 화재 후에도 2층으로 복구하였다. 그만큼 고종이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석어당은 단청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덕수궁에 있는 여러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단청이 없고 2층 구조인 건물이어서 사람들의 눈을 잡아끈다.

 

단청이 없는 이유는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려웠던 일을 떠올리며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라 단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는 선조의 환도(還都) 3주갑(三周甲 180)을 맞아 세손(정조)와 함께 배례했다고 하며, 고종은 5주갑(1893)일 때 세자(순종)와 추모 사배례하고 부근 노인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창덕궁 내에 있는 민가 낙선재도 민가 건물이기 때문에 단청을 안 했듯이 석어당도 민가라 단청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남향인 석어당은 1층 정면 8, 측면 3칸이며,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그리고 1층에는 방과 대청을, 2층에는 구획 없이 하나의 마루를 깔았다. 문을 열어 펼쳐놓으면 경회루 2층을 연상하면 된다. 1층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그 좌우로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대청 앞 툇간 2칸은 개방하였다. 출입이 안 되니 멀찌감치서 강 건너 불 보듯 상상한다.

 

건물 기단은 장대석 한벌대를 낮게 깔고 그 위에 다시 장대석 세벌대로 기단을 쌓았다. 그 위에 네모뿔대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기단 앞 가운데 돌계단 두 틀을 설치하였다. 또한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건물 뒤쪽에 개흘레 즉, 가퇴를 덧달았으며 개흘레 사이에는 쪽마루를 내고 난간을 둘렀다. 지붕 마루는 양성하지 않고 용두나 잡상 등도 배열하지 않았다. 원래는 석어당도 행각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동북쪽으로는 화초장이 있었다고 한다.

 

 석어당 뒤쪽 벽면이 원래 벽보다 튀어나와 있는데 옷이나 세간을 넣는 벽장으로 개흘레라 부른다.


즉조당은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임시 정전으로 사용했다. 즉조당은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 이후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이기도 하며, 건물은 정면 7,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엄귀비(순천황귀비)는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아관파천 때 고종과 순종을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켜준 상궁이고 후에 영친왕 생모다.

 

준명당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타버린 뒤에 1905년 석어당, 즉조당(卽阼堂)과 함께 다시 지었다. 정전의 뒤편에는 고종의 옹주에 대한 사랑이 컸음을 보여준다. 고종은 옹주를 위해 특별히 유치원도 마련하였다. 덕수궁의 준명당(浚明堂)은 황제의 편전이었으나 1916년 고종은 이곳을 덕수궁의 꽃옹주의 유치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준명당 앞쪽에 덕혜옹주의 안전을 위해 만들었던 안전대 흔적

 

15비운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

 

환갑인 고종에게 1912525일 덕수궁 궁인 양씨가 딸을 낳았다. 덕혜옹주(19121989). 고종황제는 총 9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31녀만이 성년으로 성장하였는데, 덕혜옹주가 유일한 딸이었다. 일본의 통치하에 태어난 덕혜옹주는 황실 호적에 오르지도 못했다. 딸바보 고종은 옹주를 위해 황제의 편전이었던 덕수궁의 준명당(浚明堂)을 유치원으로 개조하여 덕수궁의 꽃옹주의 유치원으로 활용하게 했다.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뉴시스 2007. 02. 22)


19191월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는데 옹주의 나이 여덟 살이었다. 1921년 옹주는 일본인을 위한 일출소학교에 다니며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1925년에는 도쿄 유학의 명이 떨어졌다. 일본에 온 덕혜옹주는 천황가와 귀족 집안 자제들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에 입학하였다. 1929년에는 생모인 귀인 양씨가 사망하자 잠시 귀국했었고 19315월 도쿄대 출신 일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그러나 19556월에는 남편과 이혼을 하면서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일본에 머물던 덕혜옹주가 196212638년 만에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다가 1989478세로 사망했다. 옹주의 무덤은 경기 남양주시 고종의 무덤 바로 뒤편에 잠들어 있단다

 

 준명당 뒤쪽 굴뚝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