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샘의 덕수궁 탐방 2 세상이 근대화에 목숨 걸 때 파천병 걸린 고종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5/04 [13:20]

두샘의 덕수궁 탐방 2 세상이 근대화에 목숨 걸 때 파천병 걸린 고종

정흥교 | 입력 : 2021/05/04 [13:20]

 


E-1 고종 즉위

 

합법적 왕위 계승은 직계 자손이 없을 때는 대를 거슬러 올라가 방계 핏줄을 찾아 왕위를 계승시켰는데, 철종과 고종이 이에 해당한다. 철종이 후사 없이 각혈하자 이하응은 당시 궁궐의 제일 어른으로 헌종의 생모이며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55)와 면담하였다. 신전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익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약속하였다. 186312월 철종이 32살의 젊은 나이로 죽자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 : 고종의 아명)이 조대비에 의해 창덕궁 인정문에서 11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은 흥선대원군(43)으로 진봉되었으며, 조대비에게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서정(庶政)을 총괄하게 되었다.

 

 영조에서 순종까지 가계도

 

자료 https://blog.naver.com/hongyw/221551128078 

 

이제 조정의 실권은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갔다. 흥선대원군은 우선 인사권을 장악하고 그동안 세도정치를 해오던 외척 세력을 몰아내고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고 문란해진 국가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내정을 개혁했다. 효명세자가 이루지 못한 꿈이었던 서원 철폐, 호포법 실시, 경복궁 중건, 삼정문란 개혁 등을 10년 동안 하나하나씩 실현해 나갔다.

 

 러시아 공사관


흥선대원군은 외척 세도를 봉쇄하기 위해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의 딸(16)을 고종의 비로 맞이했다(1866년 고종 3). 그러나 명성황후는 대원군 반대세력을 결집하여 대원군 축출을 추진했고 1873(고종 10, 고종 22)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를 계기로 11월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 양주에 은거했다.

 

1882(고종 19) 임오군란, 1884(고종 21) 갑신정변 등 혼란을 겪었다. 무엇보다 1895(고종 32)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고종 33) 211일 새벽 경복궁 영추문을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소위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 1년 동안 숱한 국가 재산이 러시아와 미국으로 넘어갔다.

 

스스로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중세에 머물러 있는 국가와 민족은 열강들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순리였을 당시 아관파천을 감행했고, 미관(美館)파천, 영관(英館)파천, 불관(佛館)파천을 수시로 타진하는 추태를 부렸다.   

 

일관파천 미관파천

영관파천 미관파천

영관파천 미관파천

성공한 아관파천

파천왕

고종의 업적이요

67기 오뚝이

 

일어설 때마다 전국은 열광했다

45기 홍수환은

목메어 울부짖는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대한국민 만세다

 

지도자가 필요할 그때마다 선물 받고

을사오적 날뛰는데 부채질에 뒷짐이라

총 한 방

쏘지도 못하고 갖다 바친 대한제국 

 

E-2 근대 도시의 형성과 경운궁 시대

 

고종은 환궁하기 이전부터 경운궁을 새로운 궁궐로 삼기 위해 계획하고 있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대신에 경운궁을 택한 것은 미국, 러시아 등 서양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경운궁 가까이 있어서 일본을 견제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경운궁 궁궐 정비를 지시하고, <내부령> 9호를 제정하여 도성 안의 도로를 정비확장하는 등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여 한성이 근대적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아관파천 1년여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곧바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황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으며, ‘경운궁 시대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수궁 전시실 해설 전문)

 

1896928일 발령된 내부령(內部令) 9

한성부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중요 사업을 포함하고 있다.

 

1. 종로, 남대문로 등 한성부의 주요 도로를 침범한 무허가 가옥을 철거해 본래의 도로 공간을 회복.

2. 아관파천 이후 법궁(法宮)으로 새로 건설된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을 중심으로 방사상 도로를 새로 만들어 기존의 도로들과 연결하여 도시 구조를 방사상 도로를 중심으로 재정립.

3. 경운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을 연결할 간선 도로망 정비. 이외에 현재까지 포착할 수 있는 사업들로는 경운궁, 독립문, 원구단, 황제 즉위 40주년 기념 비전 축조 및 독립공원, 경운궁 퍼브릭 파크, 탑골공원 조성 등이 있다. 또한, 한성 시내에 전기, 수도, 전차, 철도를 도입했다. (자료 https://blog.naver.com/simontek/222063330415)  

 

E-3. 고종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

 

인조반정 이후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가 270년 뒤인 1897(고종 34, 광무 1) 220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운궁이 임진왜란 후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경운궁은 기존의 궁궐들과는 다르게 도시화가 진전된 도심에 건설된 궁궐이었다. 그래서 경운궁의 현실적 상황에 따라 황궁 영역을 넓혀가면서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을 연달아 세웠다.

 

여러 차례에 걸쳐 영국공사관 옆 선원전 영역과 미국공사관 옆 중명전 영역 등 경운궁 주변 지역을 매입하였고, 경운궁의 남쪽 담장을 새로 정비하여 점차 궁역을 넓혀갔다. 또한 경운궁 앞 현 조선호텔 자리에 환구단과 황궁우를 지었다. 그리고 816일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부국강병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드디어 9월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1012일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으로 선포하였다. 지금까지 천세를 부르던 신하들은 이제 만세3번 외쳤다. 그리고 태극전(현 즉조당)에서 황제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

 

 미국공사관


18998월 고종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를 발표하여 황제에게 육해군의 통수권과 입법권, 행정권, 관리임면권 등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다. 또한 국가의 자주성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도록 국방과 재정,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근대적 기술학교들이 대거 설립되었고, 교통과 통신을 근대화하는 사업들도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고종은 조선이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한 것을 상기시키고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국호가 되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시원인 셈이다. 경운궁은 이제 당당한 황제국 조선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사도세자는 1899(광무 3) 91일 장조로 추존되어 묘도 현륭원에서 융릉으로 승격된다

 

 프랑스공사관


E-4. 명성황후의 국장(國葬)

 

18971012일에 대한제국이 탄생한 이후 가장 먼저 치른 국가적 행사는 1121일에 있었던 명성황후(18511895) 국장(國葬)이었다. 장례는 왕후가 1895년 음력 820(양력 108) 을미사변 때 경복궁 건청궁에서 시해되고 불에 태워져 남은 건 불에 탄 뼛조각과 숯덩어리뿐이었단다. 18979월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을 경운궁 석어당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중전 명성황후를 법적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황후로 임명했다. 경복궁 집옥재에 봉안되었던 역대 선왕의 어진도 경운궁 별당으로 옮겼다.

 

명성황후 장례식은 살해된 지 21개월 후인 1897(광무) 11월에 서울 청량리 밖 홍릉(洪陵)이었고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1919년 고종의 장례 때 경기도 남양주 금곡의 홍릉에 합장되었다.

 

 대안문 앞 흰옷을 입은 인파가 가득한 것으로 보아 명성황후 국장을 애도하는 행사로 추정한다. (덕수궁 안내자료)


E-5 경운궁 대화재

 

1904(광무 8) 414일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고종의 거처인 덕수궁 함녕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30분 후쯤 화재를 알리는 비상벨이 궁궐에 울려 퍼졌다. 불은 삽시간에 덕수궁의 주요 전각을 덮쳤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보수를 거쳐 당당한 위상을 자랑하던 궁궐은 하룻밤에 잿더미가 됐다.

 

고종은 함녕전에 있다가 급히 즉조당으로 옮겼는데, 불길이 다시 즉조당으로 번지자 덕수궁 서문을 나와 수옥헌으로 피신했다. 이제 수옥헌은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알현실이 된다. 일본 공사는 고종에게 불탄 덕수궁을 떠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거듭해 압박했으나 고종은 끝까지 거부하고 삼문삼조의 형식을 취해 재건하도록 명령하였다.

 

공식적인 원인은 함녕전에 새로 만든 아궁이의 과열이었다. 그러나 궁궐이 아무리 목조건물이라 해도 하룻밤 사이에 거의 궁 전체가 몽땅 타버릴 만큼 화재가 빠르게 진행되기란 쉽지 않다.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 화재가 일어난 점도 의구심을 더하게 만든다. 일본군이 불 지르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불이 나자 곧바로 각각 불을 꺼야 하는 궁중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자기네들이 들어가 대한제국이 일본 이외의 나라들과 소통하는 비밀서류를 찾아 빼돌렸으리라는 추측이다. 또는 옥새를 찾으려 했을지도 모른단다.

 

이 화재로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다. 1905(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을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고, 중화문(中和門)과 조원문(朝元門) 등을 세웠다. 그리고 1906년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이 완성되었으며,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 고종은 다시 덕수궁을 보수하면서 서양식 건물도 지었다. 현재 덕수궁에는 중화전을 비롯해 목조건물인 석어당, 준명당, 즉조당, 함녕전과 덕홍전, 정관헌과 석조전, 광명문과 대한문, 그리고 황실도서관으로 사용되었던 준명전 등이 있다.  

 

E-6. 삼문삼조

 

고종은 정상적인 궁의 모습으로 삼문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현재의 대한문이 아닌 시청 앞 광장에 있었던 대한문을 지나면 한동안 들어가서 금천을 건너 중문인 조원문(현재 광명문 근처)을 만들게 하여 궁궐의 정식 형태인 삼문 형식을 취했다.

 

삼조는 외조ㅡ치조ㅡ연조로 연속되는 세 개의 공간을 말한다. 외조는 조정의 관료들이 근무하는 공간으로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있는 궐내각사와 의정부 및 원수부가 해당하며, 치조는 왕과 관료들이 정치를 행하는 곳으로 정전과 편전으로 중화전을 중심으로 중화문과 회랑이며, 연조는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의 일상생활 공간으로 침전인 함녕전 등이 있다.

 

 조원문 위치 및 중화전과 석조전 분수대 영역 비좁아 겹침


E-7 1차한일협약

 

러일전쟁(190428~ 19059)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223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이어서 822일에 제1차 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을사늑약의 현장(자료 덕수궁 홈페이지)


19051117일에는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선 가운데 쉴 새 없이 본회의장인 궁궐 안에까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이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살기를 내뿜고 있어도 5시간 동안 계속된 어전회의에서 누구도 찬성하지 않아 을사조약 체결은 수차 거부되었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한다.  

 

E-8. 경운궁 평면도

 

1904년 대화재 이후 중건된 경운궁(덕수궁)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경운궁의 중심영역과 돈덕전, 중명전 그리고 선원전 일부와 수학원 영역을 평면으로 그린 배치도의 청사진이다. 평면도의 제작 시기는 1907~1910년 사이로 추정된다.

 

 경운궁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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