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샘의 덕수궁 탐방 1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에서 경운궁까지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4/27 [17:50]

두샘의 덕수궁 탐방 1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에서 경운궁까지

정흥교 | 입력 : 2021/04/27 [17:50]

 

 


A. 두샘과 덕수궁

 

덕수궁? 국사 시간에서 근현대사를 배울 때 배웠겠지. 머리로 배웠지만 언제 처음 갔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청계천 복원이나 서울시청,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 그보단 덕수궁 미술관 전시에 오느라 처음 왔었을 것 같다. 2009년부터 컴퓨터에 파일로 저장된 사진을 검색해보니 201710<에셔 특별전>에 다녀갔었다.

 

 201710<에셔 특별전>에서 덕수궁 다녀감

 

201312월에는 <한국 근현대회화 100>에도 가족과 함께, 직장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시를 쓴다고 혼자 와 반나절을 전시장에 멍 때리고도 시() 한 편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던 씁쓸한 기억도 떠오른다. '덕수궁 돌담길을 여인끼리 걸으면 헤어진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가 본 기억은 없다. 최근에 취재차 덕수궁 돌담길을 다녀왔다. 유행가 <덕수궁 돌담길> 때문에 낯익은 것 같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과거 대법원과 가정법원 건물이었기에 나온 이야기라는데 노래가 불을 지핀 것 같다.

작사가 정두수의 회고문을 보면 이미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지 말라는 징크스가 노래 전에 있었단다. ‘()의 코스덕수궁 돌담길을……

 

 201312월에도 <한국 근현대회화 100>에서 덕수궁 다녀감

 

B. 덕수궁(德壽宮)이란?

 

덕수궁 하면 1907년 고종이 일본의 강압 때문에 황제의 자리를 태자 순종에게 양위하고 순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아버지 고종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단순히 <경운궁(慶運宮)><덕수궁(德壽宮)>으로 궁궐의 이름을 바꾼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덕수궁은 상왕(上王)이 거처하던 궁궐을 말하는 대명사란다.

 

조선에서 첫 번째는 태조 이성계가 정종 때 머물던 개성의 태상전, 두 번째는 1403년 태종 때 태조의 덕수궁,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현재 창경궁 내에 1406년 태종 때 덕수궁도 있었단다. 물론 태종이 상왕으로 머물던 수강궁도 덕수궁 중 하나란다. 물론 현재의 덕수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C. 정릉동 행궁으로

 

선조는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고,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장자인 임해군은 무식하고 난폭한 면이 있어 조정과 백성의 인심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다. 광해군이 세살 때 어머니인 공빈 김씨는 죽었다. 게다가 다른 후궁에게서 난 많은 왕자(14)가 각기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 김씨는 자신의 소생인 어린 신성군(14대 선조의 넷째 아들인 왕자)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쫓기어 신의주로 피난을 가는 도중 선조는 평양에서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분조(分朝, 임시로 세자에게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하는 제도)를 맡아 난리 중에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민간의 명망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20131225일 대한문 앞 근위병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무를 곳이 없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는 이미 의주로 떠날 때 불타버렸다. 그래서 선조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던 명례궁(明禮宮 : 석어당으로 추정)과 주위의 몇 채의 집을 합쳐 임시로 임금이 사용하는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에는 월산대군의 증손인 양천도정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는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삼아 1593년부터 16년 동안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중종, 인종, 명종의 가계도(선조)

자료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33XX44200035  

 

후사가 없었던 명종은 일찍이 여러 왕손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가르쳤는데, 그들 중에서 하성군이 뛰어나 공식적으로 직접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하성군을 내심 후계자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위의 복잡한 가계도를 보면 선조는 왕의 적자나 적손이 아니다. 선조는 조선에서 방계에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선조는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원로급 재상들의 도움으로 국사를 돌보았다. 그러다 17세가 된 이듬해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팔자에 없던 왕복(王福)

방계에서 왕에 올라

왜놈들 침입한단

소문에도 당파 싸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한성까지 버리네

 

60전에 60

백성들이 믿고 따르니

질투하는 선조와 신하

이순신을 죽이란다

신에겐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명랑대첩 노량해전

 

참고자료 : 1597(정유년) 2월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선조 임금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무백관(200) 모두가 "이순신은 역적이오니, 죽여야 하옵니다."하고,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성토하여도 당시 영의정이며 도체찰사인 이원익(李元翼)은 선조 임금의 사형 집행 재촉에도 ()은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解任하지 못 하옵니다.”며 반대하여 이순신은 死刑하게 되었다. 당시 문무백관 199명대 1 즉 이원익, 딱 한 사람만이 반대하여 이순신을 살려 낸 것이다.

 

 아산 현충원 이충무공 영정

 

 


선조, 광해군, 인조의 가계도

자료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33XX44200038

 

1600(선조 33)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자, 선조는 새로 간택한 인목왕후와 1602년 결혼했는데 선조의 나이는 51, 인목왕후는 19세였다. 그녀가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하였다. 16081월 선조는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렸고, 얼마 후 승하(56)하였다. 인목대비도 선조의 유명을 중시하여 광해군(33)이 보위를 잇게 했고 광해군은 조선왕조 처음으로 덕수궁에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고,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해 명분상의 약점이 있었다.

 

 도성도(평택 삼봉 정도전 선생 기념사업회 자료집에서)


광해군의 형 임해군(1574~1609)은 왕인 동생 광해군을 비방하고 다녔고, 광해는 임해군을 교동도에 유배를 보냈다가 사약을 내린다.

 

한편 창덕궁 복원이 완성돼 법궁으로 삼고 1611년 광해군은 덕수궁을 떠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궁호를 붙여주었다. 창덕궁으로 돌아온 광해군은 이곳은 단종과 연산군이 폐위되었던 곳이라 불길하다며 2달만에 경운궁으로 돌아온다.

 

또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 또한 틈만 나면 광해군을 깎아내리려고 했다.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14대 선조의 열네째 아들인 왕자)을 옹립하려는 세력으로는 인목대비와 그 아버지 김제남 등이 있었다. 광해는 16146월 서소문 밖에서 인목대비의 아버지를 죽이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1606~1614)도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는데, 결국 이듬해 죽게 만든다.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는 불과 9세였다. 또한 광해군은 1618년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는데 결국 부메랑을 맞는다. 조선시대에서 유일하게 자식이 어머니를 폐위시킨 사건이었다. 비록 계모이지만 어머니를 폐위한 것은 광해군의 원죄가 됐다.

 

인목대비 김씨는 선조의 계비다. 계비는 왕비가 죽고 나서 새로 들어온 비를 뜻하는데, 계비 역시 중전이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어머니이다. 광해군이 선조의 뜻을 받들어 즉위할 때 중전으로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는데, 자신의 친아들을 폐서인시킨 뒤 강화도에 유배를 보내고는 밀실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질식사시켰다.

 

16154월 궁궐병에 걸린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경운궁에서 계속 변괴가 일어난다는 이유였다. 1618(광해군 10)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서궁으로 격을 낮추었다. 1623년 선조의 손자인 28살 능양군(綾陽君)48세인 삼촌 광해군을 쫓아내고 경운궁 즉조당에서 16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인목대비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광해는 인목대비 앞에서 무릎이 꿇어 앉혀지고 그녀가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광해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 지내고 싶다. 10여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적어준 38가지의 죄목을 큰소리로 따라 외쳐야 했다. 광해는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반정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죄인이 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인조는 곧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뒤 선조의 침전 두 곳(즉조당, 석어당 추정)을 제외하고 경운궁의 가옥이나 대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래서 경운궁은 다시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경운궁


D. 덕수궁 터 첫번째 주인은 조선 첫번째 중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의 첫째 부인은 한씨다. 1337년 태어나 15살이 되었을 때 이성계에게 시집을 와서 62(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경신, 경선)를 출산했다. 이성계가 전쟁터를 누비는 중 한씨는 내조를 열심히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방우, 이방과, 이방원 등 무시무시한 아들들을 두고 있는 한씨는 조선 건국 1년 전에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고려를 고려장 하곤

힘차게 출발하며

보지는 못했지만

만만한 게 홍어 ?

희대의 호랑이 제치고

열 살짜리 세자라  

 

이성계는 강씨와 정략결혼(문벌 귀족 출신 강씨)을 하였다. 이성계보다 20살 가량 연하였으므로 방우보다 나이가 적었다. 강씨는 방석과 방번을 낳으며 한씨의 자녀들과도 잘 지냈고 조선의 개국 과정에서도 나름 역할을 한 듯 보인다. 1335년 조선의 개국에서 첫 번째 중전은 신덕왕후 강씨가 차지했다.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 만인 1392(태조 1) 8월에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이방석(李芳碩 1382 ~ 1398)을 세자에 책봉했다. 불과 10살이었다. 태조와 신덕왕후의 마음은 원래 첫째 아들인 이방번(李芳蕃)에게 있었다. 한편 세자를 지지하는 세력으로는 이성계의 신임을 받는 정도전과 방석의 장인 심효생(沈孝生), 과격한 개혁파 남은(南誾) 등이 있었다.

 

 삼봉 정도전 선생 영정(자료 평택 삼봉기념관, 권오창 화백 작)


모락모락 피어나는

정씨 왕조 잘라내며

피로 물든 경복궁

왕부터 기피했다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도

칼 겨누는 원수지간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은 1398(태조 7)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 난으로 방번, 방석 형제와 정도전, 심효생, 남은 등 방석 지지세력이 제거되었다. 이 일로 태조는 그해 9, 한씨 소생의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00(정종 2), 한씨 소생의 넷째 아들 방간(1421, 세종 3년 사망)이 정변을 일으켰으나 방원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은 스스로 세자가 되었고 1401(태종 1)에 왕위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에 머물다 말년에 한양으로 돌아왔고 1408(태종 8) 524일에 향년 74세로 창덕궁 별전에서 죽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원수지간으로 만들고, 형제들끼리 칼을 겨누게 만드는 것이 곧 권력임을 조선 개국부터 여실히 보여주었다.

 

신덕왕후가 1396(태조 5) 915(음력 813)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를 끔찍이 사랑했던 탓에 그의 묘를 '정릉'이라 하고 그의 무덤을 사대문 안에 두었으며,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까지 세웠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방석)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훗날 태종이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태종은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그의 묘 정릉을 사대문 밖인 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260년이 지난 1669년 현종 시절 송시열의 상소를 받아들여 왕비로 복원하고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능을 재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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