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창경궁 탐방 6 임금이 논을 가는 봄 풍경을 제일로 꼽았다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3/03 [17:31]

안희두 창경궁 탐방 6 임금이 논을 가는 봄 풍경을 제일로 꼽았다

정흥교 | 입력 : 2021/03/03 [17:31]

 


13-4. 통명전과 장희빈(장옥정)

 

인현왕후 민씨(16675~ 17019)는 조선 숙종의 계비로 폐출되었다가 생전에 복위한 유일한 왕비다. 숙종 27(1701) 창경궁 취선당(지금의 낙선재 부근)에 머물던 희빈 장씨는 서쪽에 신당을 꾸며놓고 숙종의 처소인 창덕궁의 대조전과 인현왕후의 처소인 이곳 통명전 아래에 흉물을 묻은 다음 밤마다 무당을 불러들여 굿을 하다 발각되었다. 인현왕후는 시름시름 앓다가 1701(숙종 27) 814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희빈 장씨도 저주용품을 들켜 그해 1010일 사약을 받고 43세에 죽었다.

 

장옥정(1659년 음력 919~ 1701년 음력 1010)은 조선의 제19대 숙종의 빈으로 제20대 왕 경종의 어머니이다. 9품 사역원의 딸로 태어났으나 엄마가 여종 출신이기에 장옥정은 천민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10살일 때인 1669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당시 갑부였던 숙부가 거두어 보살펴 주었다. 성장하면서 뛰어난 미모를 갖추어 소문이 퍼졌고, 어린 나이에 자의대비전(인조의 왕비로 효종 때 대비. 현종 때 대왕대비로 숙종 14년에 사망)의 나인으로 들어갔다. 장옥정이 근무했던 대왕대비전은 임금이 매일 조석으로 문안드려야 하는 곳이기에 그녀의 자태는 자연히 숙종의 눈에 띄었다.

 

중전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인현왕후 민씨를 중전으로 맞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옥정에 대한 숙종의 사랑과 총애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댜. 서인 가문 출신이었던 명성대비는 장옥정을 밀어주는 남인의 재집권을 우려해 장희빈을 대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1686(숙종 12) 12월 명성대비의 죽음으로 장옥정이 재입궐할 수 있게 되었다. 숙종은 그녀를 위해 창경궁 북쪽에 취선당을 지어주었고 오빠 장희재도 벼락출세하여 포도부장으로 특채되었다.

 

숙종 14(1688)에 장옥정이 아들을 낳자 이듬해 숙종은 아들 균(장차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였으며 생모인 장옥정을 정1품 희빈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54일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하고 56일 드디어 장희빈을 왕비로 삼았다. 1690년 원자를 세자로 책봉했으나 장희빈이 나이 서른이 넘어 미색이 퇴조하고 숙종의 관심이 줄어든다. 복위된 인현왕후의 시녀였던 나인 최씨가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으로 선택되었다.

 

소론인 김만중은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어 간접적으로 왕비 장씨를 공격했다. 갑술환국을 거쳐 장희빈은 왕후 책봉이 취소되고 희빈으로 강등당해 취선당으로 내쫓겼다. 장희빈은 세자의 생모라는 지위만 남게 되자 매정한 숙종의 처사를 원망하면서 복귀한 인현왕후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해 920일 최숙의가 왕자 이금(장차 영조)을 낳자 장희빈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궁내에 몰래 신당을 만들어 굿을 벌이면서 통명전 주위에 쥐, , 물고기의 사체 같은 저주물을 파묻었고, 그래서인지 결국 인현 왕후(중전 민씨)는 복위한 뒤 6년밖에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 장희빈의 저주 행각은 궐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세자의 생모라는 위세에 밀려 아무도 숙종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죽자 최숙빈이 숙종에게 그간의 사정을 고해바쳤다.

 

1010, 드디어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 43세였다. 세자의 생모였으므로 숙종은 예조에 명하여 상례를 간략히 치르게 하고 관을 선인문 밖으로 내보냈다. 17206월에 숙종은 향년 60(숙종 46)에 지병으로 죽고, 33세 세자 경종이 임금이 되었으나 재위 4년 만인 1724(경종 4) 825일 죽었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나인인 숙빈 최씨가 성은을 입어 1694(숙종 20)에 낳은 연잉군이 1724(경종 4) 왕이 되니 이가 곧 21대 영조이다. 경종은 동생인 영조가 건넨 게장과 생감을 먹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죽었기에 영조는 죽을 때까지 독살설로 커다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13-5. 통명전과 귀신 소동

 

창경궁을 지을 때 풍수가였던 최양선이 이곳에 궁궐이 들어서면 자식들이 귀신에 홀릴 것이고 과부나 고아가 줄을 이을 것이다.”라고 예언하며 방책으로 종묘와 창경궁 연결 통로에 소나무를 많이 심으라 했다. 그런데 성종은 궁궐에 밖에서 내부가 보인다고 담장을 높였고 주변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런데 버드나무는 귀신들이 좋아하기에 집 주변에 심지 않는다고 한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로 후궁 정씨와 엄씨를 통명전 앞에서 끔찍하게 죽였다. 그 후 통명전에서 거처하던 여인들은 도깨비에 홀리거나 귀신에게 놀라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현종 때 돌덩이가 날아오거나 의복에 불이 붙거나 궁인의 머리카락이 잘리는 등의 귀신 소동이 자주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단다. 이곳을 거쳐간 중전이나 대비들에게도 다수가 기이한 일들이 많이 당했고 요절을 많이 했나 보다.   

 

14. 양화당(養和堂)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내전 중의 하나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으며,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순조 30) 화재로 불탄 것을 1834(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양화당


15-1. 장서각(藏書閣 구박물관)

 

1911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자경전을 헐고 그곳에 장서각이라는 일본식 2층 기와집을 지어 이왕직 도서관과 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 풍기대가 있는 곳이 바로 장서각 마당이란다. 해방 이후 조선시대 왕실의 도서를 관리하던 장서각은 그 기능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넘겨준 뒤 1992년 헐리고 지금은 녹지가 되었다.  

 

15-2. 자경전(慈慶殿)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자경전은 앞쪽으로 멀리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향하도록 지었으며, 뒤에는 계단식 화단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이곳에서 한중록을 지었다. 자경전의 위치는 풍기대가 있는 옆의 평탄한 길과 뒤로 소나무가 있는 곳이다.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대신들에게 일침을 놓았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대학 병원 자리에 있던 사도세자의 사당을 경모궁으로 고치고, 경모궁이 잘 보이는 이곳에 정조는 자경전을 지어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에게 선물했다.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때 현재 서울대 도서관인 규장각의 장서각을 지었는데 창경궁 복원사업으로 헐리었다.

 

 Naver에서 자경전 터


16. 풍기대(風旗臺)

 

풍기대(보물 제 846)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기 위해 세웠던 풍기의 받침대로 영춘헌, 집복헌 뒤 언덕 위 길가에 세워져 있다. 창덕궁이나 창덕궁 후원에서 창경궁으로 넘어오는 함양문에서 춘당지 쪽으로 200m 지점 길가에 초라하게 서 있다. 1770(영조 46)에 측우기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 창덕궁 통제문 안에 설치되었다가 해방 전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풍기대는 영조 8(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했다고 한다. 전체 높이는 228.1인데, 하부대석 높이는 92.4,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부터 농업기상학이 발달하여 농업에 영향이 큰 기상관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특히 강우량과 함께 바람의 방향과 풍속의 관측이 중요시되었다고 한다. 풍기대는 관상감과 각 궁궐에 세웠는데, 창덕궁(昌德宮)의 통제문(通制門) , 경희궁(慶熙宮)의 서화문(西華門) 안에 돌을 세우고 그 위에 바람을 관측하기 위한 깃대(風旗竹)를 꽂았다고 한다.

 

 풍기대

 

 함양문, 통명전, 양화당, 영춘헌, 집복헌, 풍기대


17.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다.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는 영조가 죽은 영춘헌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기약했다. 또한 정조가 즉위 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여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자 1800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영춘헌 건물은 2000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영춘헌(迎春軒)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순조 30)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순조 34)에 재건되었다. 집복헌은 후궁들의 처소로 1735(영조 11) 1월에는 사도세자, 1790(정조 14) 6월에 순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왼쪽이 집복헌이고 오른쪽이 영춘헌

 

 집복헌 안쪽

 

 동궐도의 일부인데, 사진에서 하단 좌측에 집복헌이 표시되어 있다. 이 일대에는 궁궐 여성들의 처소가 모여있던 생활구역이었다. 어린 왕자들과 관련된 건물도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일대의 내전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18. 성종 태실 및 성종 태실비

 

조선 왕실에서는 왕손이 태어나면 명당지를 찾아 태항아리를 묻어 보존하였다. 성종태실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태를 경기도 광주 경안면에 묻어 보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전국 각지에 있는 조선 역대 임금들의 태실을 서삼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으로 옮기게 했다. 그런데 성종태실은 1928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곳 창경궁으로 옮기게 되었다. 성종의 태를 묻어놓았던 태실과 그 제작과 수리 기간을 적은 태실비이다. 성종은 창경궁을 창건한 임금이니 일제가 그나마 대접한 것일까? 창경궁 대부분을 없애고 쓸쓸한 겨울바람만 부는 황량한 터전을 지켜보라고 약 올리는 것일까? 신성한 태실을 조각품으로 전락해 관람객에게 구경거리로 만든 것일까?

 

 성종 태실 및 태실비

 

19-1. 춘당지(春塘池)

 

춘당지는 창경궁 후원 영역에 있는 춘당대 아래 작은 연못으로 백련지 또는 백련담 등으로 부르기도 했단다. 지금의 대춘당지가 있는 곳은 내농포(內農圃)라 하여 임금이 직접 모를 심고 추수를 해 신하들에게 나눠주며 백성들의 생활을 몸소 체험했던 논이 있었단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서 아름다운 전경을 10곳을 뽑아 시를 남겼는데 그 첫 번째 1경이 관풍각(觀豊閣)으로 관풍춘경(觀豐春耕)의 시를 지었다.

 

乳鳩拂翅斑鳩鳴(유구불시반구명)

水滿公田始課耕(수만공전시과경)

自是帝王勤稼穡(자시제왕근가색)

寶歧堂下告秋成(보기당하고추성)

 

관풍각이란 풍년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현재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대춘당지 가을


내농포 터는 1909년 일제에 의해 연못으로 개조되었고, 보트도 띄워 뱃놀이도 하고 겨울엔 스케이트도 탔단다. 광복 이후엔 관람차도 돌아가고 케이블카도 설치했으며 음식점도 영업을 했나보다. 연못 속의 섬과 다리는 1984년에 조성했고, 춘당지는 1986년에 우리 전통양식에 가깝게 새로 조성했단다. 두 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의 것이 1,107(335), 아래 것이 6,483(1,961)이다. 연못 속의 섬은 366(111)으로 1984년 창경궁 복원공사 시 춘당지 연못 바닥을 준설하였는데, 그 준설토로 인해 춘당지 가운데 섬이 생기게 되었다

 

 대춘당지 안에 섬 단풍


임금이 농사 짓던

내농포가 춘당지라

정조는 관풍춘경(觀豐春耕)

으뜸이라 시를 썼네

왜놈들

케이블카에 배 띄우며

극에 달한 질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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