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창경궁 탐방 4. 창경궁에 천수(千壽)의 비밀을 품은 오층석탑관천대-숭문당-빈양문-함인정-경춘전-환경전-창경궁오층석탑
예전에 궐내각사의 터라지만 너무 싸늘했다. 궁궐이 아니라 쓸쓸한 수목원이었다. 그 끝자락에 조선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관천대가 있다. 높이는 2.2m, 넓이는 2.4m×2.3m이다. 천문을 관측하던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했던 시설로 보이며 창덕궁 후원 금마문 밖에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1985년에 보물 제851호로 지정되었다. 돌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있으며 대의 한가운데에는 다시 돌대가 놓여있어 그 위에 소간의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현재 소간의는 없다고 한다. 계단을 밟고 올라갈 수 없어 신라 첨성대를 생각하며 상상화를 잠시 그려보았다.
명정전 뒤에 있는 건물로 숭문당은 학문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숭문당에서 자주 접견하고 경연(經筵)을 벌이며 유생들을 직접 시험했다. 숭문당은 창경궁을 지을 때는 없었던 건축물로 경종(1720~1724) 때 지어졌으며 순조 때인 1830년 대화재로 불탄 것을 같은 해 가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숭문당은 정면 4칸, 옆면 3칸인데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지형을 그대로 살려 앞면에는 장초석을 사용하여 높이를 맞추었으므로 흡사 누각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명정전에서 뒤편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 있는데 빈양문으로 왕의 공적 공간인 명정전과 사적 공간인 내전을 연결하는 문이다. 빈양(賓陽)은 ‘밝음을 공경히 맞이한다’라는 뜻으로, 밝음인 국왕을 상징한다. 지금의 빈양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던 것을 1984년 발굴을 통해 1986년 중건 공사 때 재건한 것이다.
9. 함인정(涵仁亭)
함인정 자리에는 1484년(성종 15) 인양전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함인정은 1633년(인조 11)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헐어 옮겨지었고, 1830년(순조 30)에 또다시 불타 없어졌다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되었는데 건물 사방이 벽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이다. 함인정은 남향에 너른 앞마당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 적합한 장소였는데, 특히 영조와 정조가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동 ⇨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남 ⇨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북 ⇨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서 ⇨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돌려요, 물론 인터넷을 검색하면 다양한 해석이 쌓여있다.
360° 회전이라 전각의 담장과 문, 창호도 날아갔다 왕권은 둘로 나눌 수 없다 세자는 자결하라
10. 경춘전(景春殿)
경춘전의 경춘(景春)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이다. 1484년(성종 15)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다.
사도세자는 정조를 낳기 전에 용이 이곳 경춘전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경춘전 동쪽 벽에 용 그림을 그려두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다. 그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하였다.
또한, 이곳에서는 정조가 태어난 영조 28년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이자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이 세 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통명전은 창덕궁 대조전과 같은 중궁전(中宮殿), 환경전은 왕 또는 세자 등의 침전, 경춘전은 왕후 또는 세자빈 등의 침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환경전은 창경궁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다. 환경전은 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 8월 다시 소실되었으며 1834년(순조 34)에 중건했다.
환경전은 영조가 열다섯 살의 세자를 옆에 앉히고 대리청정을 했다. 이때 영조는 세자를 지켜보며 일일이 가르쳤으나 영조는 공부보다 무예를 더 좋아하는 세자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갈등은 시작되었고 영조와 세자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고 한다.
또한 환경전은 중종이 오랫동안 중풍과 이로 인한 합병증으로 대장금에게 마지막까지 치료를 받아오다 승하했다고 한다. 대장금은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출산과 지순대비의 병을 치료한 공을 인정해 중종의 주치의로 일을 했는데, 조선 역사상 의녀가 임금의 주치를 맡은 것은 대장금이 유일하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488년(성종 19) 태어났다. 1506년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조선 제11대로 왕위에 올랐다. 1544년(중종 39) 11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대장금과 처음 만난 게 1515년이라니 30여 년을 가까이 지냈다.
11-2. 창경궁오층석탑
창경궁오층석탑(昌慶宮五層石塔)은 창경궁 정전(正殿)인 명정전(明政殿) 뒤편의 환경전 돌계단 앞 10시 방향에 있는 불탑(佛塔)이다. 이 석탑은 고려 중기 사리탑으로 1912년 일본에 팔렸다가 다시 국내로 반입돼 1936년경 지금의 자리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교 가치를 지향한 조선의 궁궐에 불교 문화재인 석탑을 두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봉은사에서는 예배의 대상을 조경을 위한 장식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봉은사로 이전해 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래 소장처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특별한 연고가 없는 봉은사에 석탑을 이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입장이란다.
★창경궁오층석탑 참고자료 http://blog.daum.net/ecnoon/258
그냥 두고 가려니 발길이 자주 멈춘다 고려 시대 태어나 아직도 위풍당당 팔자에 없는 대궐 구경 노숙하는 오층탐
고향을 찾아가면 불탑 역사 뒤흔들고 날렵하고 경쾌한 춤 천상의 처용무라 천수(千壽)라 그냥 좋은 무명탑 이름조차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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