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창경궁 탐방 3. 연산군의 놀이터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라

정흥교 | 기사입력 2021/02/09 [18:11]

안희두 창경궁 탐방 3. 연산군의 놀이터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라

정흥교 | 입력 : 2021/02/09 [18:11]

 

 


5.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왕이 관리들을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다. 궁궐 자체가 동향인데 문정전은 남향으로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으로 모두 열두 칸이다. 그리고 명정전과 문정전 사이에 복도를 설치하여 비를 맞지 않고 여러 건물을 왕래할 수 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1616) 다시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정전 바닥은 마루다.


문정전은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영조는 1762513일 이곳에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했다. 그 후 뒤주는 선인문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521일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문정전 천장


사도세자(1735~1762)는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 1719~1728)가 요절하고 영조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난 두 번째 왕자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원자 정호(定號·이름을 정함)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세자는 영특하면서도 무인 기질이 강해 병서도 즐겨 읽고 오묘한 전술도 터득했다고 한다. 또한 힘 좋은 무사들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15~16세 때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기운이 대단했다. 24세 때인 영조 35(1759)무기신식이라는 병서도 지었다.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 25(1749)15세 때 영조를 대신해 국사를 대리청정할 때 시작되었다. 영조는 이전에도 무려 5회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세자 나이 4, 5, 9, 10, 14세 때였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고 영조는 세자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성 융릉(오른쪽, 사도세자)과 건릉(왼쪽, 정조) 안내도


한편 경종(1688~1724)1690(숙종 16)3세의 나이로 세자에 올랐고 세자 생활 31년만에 1720년 즉위하였다. 경종에게는 2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자식은 없었다. 첫째 부인은 1718년 죽었고, 둘째 부인인 선의왕후는 1730년에 죽었다. 허약했던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영조의 독살설을 낳았고, 이를 불식시키려고 동궁으로 왕세자의 생활공간인 창덕궁의 저승전(儲承殿)에 사도세자의 거처를 정해주었다. 참고로 순종은 세자로 긴시간을 보낸 왕은 순종으로 33, 경종이 31, 문종 30, 인종 25, 정조 18년이다. 사도세자는 28년간의 생애에서 세자로 보낸 기간이 27년으로 68세의 부왕에 의해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났다.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저승전은 경종의 비 선의왕후가 살던 곳으로, 과거 경종의 나인이었던 한상궁과 이상궁에게 세자의 훈육을 맡겼다. 세자는 틈틈이 상궁들과 전쟁놀이를 즐겼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가 세자를 엄히 추궁하고 두 상궁에게 혹형을 가하여 목숨을 빼앗았다. 또한 영조는 대신들 앞에서 세자에게 호통을 쳤고 세자는 극심한 불안감과 공포심을 느껴 점점 주눅이 들어갔다. 세자의 정신질환은 20세인 1755(영조 31)경부터 시작되었다.

 

한중록에 의하면 세자가 옷을 입기 싫어하는 의대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세자가 부왕을 만나기 싫어서 생겨난 증세였다. 그 후 세자는 수시로 발작했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몹시 후회하고 그때마다 부왕이 꾸짖으니 두려움에 빠지면서 증세가 더욱 깊어갔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도 세월이 흐를수록 뻗대기만 하는가 보다. 키가 약 16m까지 자라며 내한성이 강하다. 나는 이 주목을 바라볼 때마다 영조가 떠오른다.


1760년경부터 사도세자는 여러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761년에는 자신의 후궁인 경빈 박씨를 때려죽였다. 또한 세자는 1761(영조 37) 4월 평안도 지방을 20여 일 여행하고 돌아왔다. 넉 달 후 영조가 이를 추궁하자 세자는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잘못을 빌었다. 522, 나경언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고발했다.  

 

 정조의 능인 건릉(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68세의 영조는 화가 치솟아 며칠을 번민하던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로 폐하며 관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한 후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가 엎드려 용서를 빌었으나 영조는 쌀을 담아두는 궤짝인 뒤주를 가져오게 했다. 뒤주에 갇혀 더위와 굶주림에 갇힌 지 8일째 되던 날 선인문 부근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 하는데, 영조 38(1762) 521일로 세자 나이 스물여덟이다. (다음백과 요약)

 

문정전 하면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은 연산군이다. 문정전 앞에서 잔치를 벌이며 자신이 직접 북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춤을 추기도 했다. 처용무만큼 시를 좋아했던 연산군은 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요한 문정전 앞뜰


宗社幽靈不念誠(종사유령불염성)

如何忍頑我傷情(여하인완아상정)

連年四子離如夢(연년사자이여몽)

哀淚千行便濯纓(애루천행변탁영)

 

종묘사직 영혼이 내 지성을 생각지 않아

어찌 이다지도 내 마음이 상하는지

해를 이어 네 아들이 꿈 같이 떠나가니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을 적시네.

연산군의 시() / 연산군 일기에서

 

연산군은 타고난 감수성으로 수백 편의 시를 남겼는데 반정 후 모두 없어지고 실록에 100여 편 만남아 있다고 한다. 위의 시는 연산군이 중종반정(150691)으로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귀양을 보낸 죄인을 일정한 곳에 가두어 둠)되었을 때 쓴 시다.

 

연산군의 아내 신씨는 정청궁에, 아들인 세자는 강원도 정선, 창녕대군은 경기도 평택에 유배되었다. 숙의 이씨의 아들 양평군은 충북 제천, 후궁의 아들인 돈수는 황해도 금천군에 유배되었다. 채 열 살도 안 된 연산군의 아들들은 1506924일 세자익위사 소속 군관들이 세자를 옹립하려 한다는 역모에 걸려 모두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아들 4형제가 모두 역모에 얽혀 사사되었다는 소식에 연산군은 식음을 전폐했다. 그는 유배된 지 두 달 후인 116, 의문의 역질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마감했다.

 

 궐내각사서 터애서 마주친 회화나무 / 회화나무는 궁궐에서 즐겨 심던 나무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사찰같은 곳에서도 많이 심었다. 옛날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가 난다고 믿었다. /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누군가 떠받쳐 주었으면 조선의 역사가 당연히 바뀌었겠지. 왕도 패륜을 일삼으면 신하들이 바꿀 수 있다는 조선 역사의 비싼 역모 주춧돌을 놓았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당시의 권신 한명회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정치적 결탁에 의한 것이다.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당시 성종은 한명회의 딸에게 장가든 상태였다.

 

그런데 한명회의 큰딸, 즉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 한씨가 소생 없이 1474년에 19세의 나이로 죽는다. 공혜왕후가 죽을 당시 이미 성종에겐 여러 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18세이던 성종은 윤기견의 딸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에게 빠져있었으며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새 왕비 윤씨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보다 당시 함께 성종의 후궁으로 있던 여인들은 왕비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관계로 질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윤씨가 왕비가 되고 왕자까지 생산했지만, 그녀는 물론 그녀의 집안도 왕실에서 왕따였다.

 

 창경궁 안의 나무, 오랜 세월을 살다보면 사지를 도려내는 아픔도 있는 것을잘린 부분이 잡귀의 얼굴 같기도 하고 태종 같기도 하다.


성종은 누군가의 제보를 받고 중전의 방을 뒤져 비상과 방술서를 발견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성종은 중전 윤씨를 폐출하였다. 그런데 쫓겨난 뒤에도 반성하는 빛이 전혀 없다며 결국 사약을 내렸다.

 

윤씨의 폐출과 죽음의 배경엔 시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가 정현왕후를 중전으로 삼기 위안 음모의 결과라고 한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비록 왕비가 되었지만 의지할 만한 변변한 힘조차 없던 한 여인은 집안 좋은 궁중 여인들의 집단 괴롭힘을 당하며 처참하게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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