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화문(弘化門) 창경궁(보물 제384호)의 정문인 홍화문은 성종 15년인 1484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창경궁의 정문이다. 홍화문은 다른 궁궐의 정문과 달리 동향인데, 명정전이 동향이기 때문이다. 홍화(弘化)는 ‘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2. 옥천교(玉川橋) 어느 궁이나 정문으로 들어가서 정전을 가려면 금천(禁川)을 건너야 한다. 없던 물길도 일부러 끌어와 금천을 만드는 이유는 풍수지리에 의한 배산임수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궁궐의 안과 밖의 경계로 삼아 입궐하는 신하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잡는 의미도 있다. 창경궁 금천은 1484년(성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하여 옥천교(보물 제386호)라 하였다.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홍화문(弘化門)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천에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옥천교는 창경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조물이다. 그리고 수량인 적지만 5대 궁궐 중 금천이 유일하게 살아있다. 비가 많이 내일 때 옥천교의 모습은 장관이란다.
옥천교를 건너면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 보물 제385호)이 있는데 공사 중이다. 중문의 기능을 갖는 명정문은 명정전과 같이 광해군 때 재건된 건축물이다. 통째로 가림막이 하늘에 다다르기에 대형 사진만 보인다. 명정문 남쪽 행각에 있는 문으로 나갔다가 ㄷ자로 명정전 행각으로 들어가야 한다.
금천(禁川) 위에 놓인 옥천교를 건너면 앞에 명정문과 좌우 행랑채가 대칭을 이룬다. 명정문을 지나면 널찍한 뜰이 나오고, 그 일직선 위의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명정전이 보인다. 또한 홍화문 좌우의 행랑이 명정전 행각까지 계속되면서 울타리를 이루어, 창경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명정문은 홍화문보다 높은 지대에 있고, 명정전은 명정문보다 한층 더 높은 곳에 있다.
옥천교에서 뻥 뚫린 명정문 바라보며 답답했던 가슴 속 내장까지 뚫렸다 뻥이오 시원스레 휴전선도 터졌다 그런 날 쉬 오겠지
4. 명정전(明政殿) 명정문이 공사 중이라 궐내각사터로 나갔다가 ㄷ 자로 곧바로 조정으로 들어왔다. 조정에는 역시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고 명정문에서 명정전(국보 제226호)으로 가는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그리고 삼도 밖의 좌우에는 품계석이 있다. 명정문에서 명정전으로 이어진 행각에는 정조 임금이 설치한 친위대인 장용영이 주둔했던 곳이란다.
그래 그래 이거야 정전이든 편전이든 천민도 담이 있고 대문도 여닫거늘 바람도 머물 곳이 없구나 흉흉한 날선 바람
명정전 구역을 둘러싸고 있는 명정전의 행각은 명정문과 함께 보물 제3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행각은 조선 정조 때 왕을 지키기 위해 만든 군대, 장용영의 군사들이 머물렀던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수도 한양에는 수도와 함께 왕을 지키기 위한 군대로 5군영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 5개가 바로 5군영이다.
정조는 경희궁에서 행한 즉위식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했다. 이후 암살을 경고하는 편지들을 많이 받아왔다고, 1년도 안 되어 자객들이 침전 지붕까지 다가왔다. 역적의 아들이라는 숙명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정조는 세 번이나 암살하려는 침입이 시도되었기에 항상 옷을 입고, 칼을 옆에 둔 채로 쪽잠을 잤다고 한다.
명정전은 성종 14년(1483)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였다. 순조와 인조 때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무사히 보존되어 조선의 궁궐 정전 중 제일 오래된 건물이 되었다. 명정전 건물 안에는 왕이 앉았던 용상과 그 뒤에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다. 계단 중앙의 답도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으며, 월대 위 양옆으로 드므가 있다. 중앙 칸 천장의 봉황은 나무 조각을 따로 해서 채색한 후 장식했다.
<저작권자 ⓒ 수원인터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