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광교산에 올라 인생을 묻다

정흥교 | 기사입력 2020/12/28 [18:18]

안희두, 광교산에 올라 인생을 묻다

정흥교 | 입력 : 2020/12/28 [18:18]

 


어느 해이건 힘들지 않았던 적이 있었으랴만 2020년은 세계적으로 지구촌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으리라 생각된다. 역대 어떠한 전쟁이나 질병이 조용히 숨죽이며 다가와 이렇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거두고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으며 쇄국정책을 강요한 적이 있었던가?

 

나도 연초만 해도 2020년은 해외여행의 해로 정했었다. 3월에 친족 모임으로 대만, 5월에 아들과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하고 태평양 연안 몇 개 지역도 관광하고 돌아와 틈새 공략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각각 10일씩, 블라디보스톡 5, 다소 위험하지만 이집트를 보름 정도 계획하고 있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점점 조여오는 불치의 병이 그나마 허락할 때 해외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금방 잡힐 듯하던 코로나19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린다. 해외는커녕 집밖에 나서기도 이제 쉽지 않게 지구촌은 변했다.

 

수원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다. 그리고 광교산은 엄마의 약손이요, 나의 시혼(詩魂)이다. 새해를 앞두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그래도 가슴에 남아있는 망망한 꿈을 어찌하며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광교산에 물어보고 싶었다.   

 

날이면 날마다 꽃구름 피어나게

서로가 서로를 나보다 위하는 맘

끝없이 울려 퍼지는 곱고 고운 이중창

 

<시작노트> 신혼 8개월로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왔고 직장도 안동에서 수원으로 옮긴 지 4달째인 198379일 중앙일보 독자시조란에 소개된 필자의 시조다.   

 

광교산을 아무리 가고 싶어도 지금은 솔직히 나 혼자 갈 수는 없다. 교통편이야 택시를 이용한다 해도 같이 등반하며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내에게 광교산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앞으로 가기가 어려울 것 같은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지 흔쾌하게 동행하기로 했다. 아내에겐 무리한 광교산 산행인데 나를 보호해주기 위해 기꺼이 동의했으리라.

 

·고등학교 서울 지역 친구들과 월 1회 다니던 서울 인근 산행은 이젠 나에겐 동행에서 추억으로 바뀌었다. 고위험군 환자와 함께 다니다 무슨 봉변을 당할까 친구들의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게 진정한 벗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모두 접었다. 2020년 골프동호회 모임도 모두 탈퇴했다.

 

 반딧불이화장실


얼마 전인 125일 오후 9KBS-TV 뉴스에 죽어가며 코로나19를 경고한 미국의 코미디언 루나 씨가 인터뷰한 영상을 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코로나19가 그렇게 무시무시하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 나도 주변부터 정리해야 하나? 고등학교 때 일기부터 대학 시절 시작노트와 수필 등 50여 년간 보관해 오던 잡동사니 짐들을 이제 내가 스스로 정리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반딧불이화장실 <대상> 상패


9시가 조금 넘어 반딧불이화장실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광교산 입구에 있는 반딧불이 화장실은 1999년에 준공되었다. 화장실이라기보다는 카페 같은 분위기라 아름다운 화장실 대상을 받았다.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단체로 견학을 오는 유명관광지가 되었다.

 

화장실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고 심재덕 회장이다. 민선1·2대 수원시장이요, 17대 국회의원이며, 세계화장실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분이다. 198811월부터 수원문화원이 발간하는 월간 수원사랑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수원문화원 심재덕 원장님을 자주 뵈었다. 나는 수원 화성행궁 복원 발기인에도 참여했고, 연날리기 대회, 55일 수원화성성곽 순례, 한여름 밤의 음악제 등등 수원문화원이 주관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반딧불이화장실을 떠나 급경사를 오르는데 전화가 온다. 아내다. <대상> 명패와 화장실 내부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같이 가자고 내가 약속을 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렸다. 사진을 찍고 나니 아내가 저 앞에 먼저 올라가 빨리 오라고 손을 흔든다. 혼자 앞서가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알았다고 손을 흔들며 출발했다. 그런데 아내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내가 무슨 옷을 입고 왔던가 떠올려봐도 배낭을 메었다는 것 외에 생각나지 않는다. 엉뚱한 사람을 아내로 착각한 것이다.

 

지난 10월 말 서울 덕수궁에 가던 날도 그랬다. 도로 중간 공사장에서 덕수궁 대한문을 사진 찍다가 횡단보도 신호가 끝나가는 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갑자기 고함에 뒤를 돌아보니 아내가 뒤에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엉뚱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여 종종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는 곳이다.

 

1981년 사립인 안동 A고교에서 근무하다 결혼 후 수원 B고교로 옮겼고, 19903월 사립학교에서 공립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C중학교에서 평교사협의회를 이끌면서 교육 현장연구에 눈을 떴다. 월간 우리교육에 다양하고 흥미로우며 새로운 학습 방법을 제시했고, EBS-TV에도 출연하였다. 또한 <EBS-TV 1수학> 영상제작에 자문교사와 <EBS-TV 2수학> 교재 집필진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KBS 발행 중학생용 월간 열린 생각 좋은 글에 수학 역사 이야기를 1년간 연재하였다. 1994년부터 경기도교육청 교과협의회가 내 삶의 전부인 양 시간을 쏟아부어 여기저기 강연은 물론 각종 연구와 우수아 및 실업계 수학지도 자료집 집필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예전보다 많이 매달린 표지판, 세월이 갈수록 갈림길 표시판만 늘어난다.


그 정점은 노무현 대통령이 떠나던 날인 2009523일 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수학교육학회 주최 <42회 전국 수학교육 연구대회>(강원대학교)에서 기조 강연을 했다. 주제는 수학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흥미 유발 방안 탐색이었다. 무엇보다 고2, 3 담임과 인문계고 교감으로 새벽 7에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을 밥 먹듯이 했다. 가족은 물론 세상과 등진 10여 년이었다.

 

그때 그 자료들은 <표지와 내가 쓴 원고>만 별도로 떼어서 보관하고, 나머지는 2년 전에야 버렸다. 라면상자로 20박스가 넘는다. 그랬어도 책장 3개 정도 줄어들었지 별로 변한 게 없다. 옛날 인쇄용지를 작성할 때 원안지 밑에 놓던 철판(흔히 가리방)에서 한글 타자기, CD, 대용량 외장용 하드 등등, 아니 교단을 출발할 때부터 학생들에게 받은 편지는 물론 쪽지, 모둠일기 등 30년 이상 간직해 온 것들을 새해엔 진달래 꽃바람에 띄워 버리려고 한다.   

 

맨발로 기다리다

예까지 뛰어왔나

상기된 붉은 얼굴

방긋 웃다 떨구누나

온 산이 붉게 타오른다

열여덟 살 순이다

 

<시작노트> 20여 년 전 반디불이화장실 쪽에서 형제봉을 오르다 얻은 필자의 시조이다.   

 

어느덧 형제봉에 가까워진다. 형제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데 아내가 생략하자고 할까봐 걱정이었다. 산의 정기를 받으려면 바위산을 올라가야 하는데, 오늘부터 걱정한 것도 아니다. 2주 전 광교산에 가자고 제안할 때부터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와보니 형제봉 정상인 바위에 오르며 잡았던 밧줄은 남아있지만, 옆구리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교산 형제봉(해발 448)에 오르는계단이 보인다.


아내는 벌써 형제봉 정상 비석 주변 바위에 앉아 쉬고 있지 않던가.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걱정거리의 90%는 실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괜한 걱정으로 올라오는 데 힘만 들었다. 910분에 반딧불이화장실에서 떠나 1045분이니 시간이 꽤 걸렸다. 예전이면 쉬면서 올라와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는데

 

 형제봉에서 수원 시내 전망(201277)


형제봉에 오르는 354개의 계단(길이 212, 2.4)20086월에 설치하였는데, 이곳은 등산객들의 발길로 너무 많이 패여 설치하기를 잘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상 쪽 계단은 20176월 설치했단다. 위의 사진에서 왼쪽 상단부근 파란색 망으로 된 부근에 벼락이 떨어져 낙석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안전상 설치했다는데, 철제물이라 오히려 비가 올 때 벼락을 자주 데리고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201277일 형제봉에서


형제봉 바로 옆에 아우봉이 있는데 대부분 사람이 외면한다. 나라도 아우봉에 들려 격려를 해주고 가야 했는데 솔직히 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에게 아우봉에 가자고 말도 꺼내지 못하고 비로봉으로 향했다. 형제봉에서 양지재 쪽으로 내려가려면 네발로 기어가야 했는데, 계단으로 바뀌어 하산하기에 쉬웠다. 금방 뒤바뀐 내 마음이 너무 가벼운가

 

 형제봉에서 양지재로 내려오는 도중 쉼터 인근 잘려나간 나무들


형제봉과 비로봉 사이 양지재는 몸이 풀리어 가볍게 뛰거나 빠른 걸음으로 걷기에 좋았었다. 그런데 제법 큰 전망대가 만들어졌고, 조망을 위해선지 나무들이 무참히 베어졌다. 다시 나무계단을 힘들게 오르다 보면 비로봉 가까이에 <김준룡장군전적비>가 있다. 대부분 등산객이 외면하고 간다. 안내 게시판에서 잠시 쉬면서 글만 읽고 지나가도 좋으련만, 제대로 읽었다면 힘이 불끈 솟아나 140m를 더 걸어 참배하고 가리라 생각한다

 

 김준룡(金俊龍) 장군 전승지 및 비(경기도기념물 제38)


한민족 역사상 가장 뼈아픈 전쟁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2~ 16371)’이라 생각한다. 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으로 끝났다. 병자호란 때 광교산은 청나라 군사와 전투에서 대승한 김준룡(金俊龍 1586 ~ 1642) 장군의 전승지였다. 수원화성을 축성할 때 총리대신이었던 채제공이 전승 사실을 전해 듣고 암반을 비석 모양으로 다듬고 글자를 새겼다. 적 장수 양고리는 청나라 태조의 사위이자 청 태종 매부를 사살하며 대첩을 거두었다.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중앙에 큰 글씨로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 오른쪽에는 작은 글씨로 병자청란공제호남병(丙子淸乨公提湖南兵)’, 왼쪽에는 근왕지차살청삼대장(覲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고 쓰여 있단다.

(https://blog.naver.com/damool38/221330710572인용)

 

힘들어도 아내와 같이 참배하였다. 누군가 이곳에 올라와서 깨끗이 쓸던 빗자루만 쓸쓸히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 70m를 되돌아 비로봉(해발 488m)으로 올라갔다.

 

 가운데 용인시 이정표를 양쪽에서 수원시 이정표가 포위하고 있다. 그 바람에 비로봉(종루봉)은 등산객을 빼앗긴다.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비로봉으로 올랐다가 토끼 재로 가거나, 비로봉에 오르지 않고 직접 토끼 재로 가는 길이 있다. 아니 유독 광교산엔 봉우리나 언덕을 직접 오르지 않고 그야말로 쉽게 가는 둘레길이 너무 많다. 급경사를 오르며 땀은 흐르나 즐거웠다. 해발 488m의 정상에는 2층짜리 정자가 있는데, 이름은 망해정(望海亭)이다.  

 

 

망해정 정자에 걸린 현판(광교산 종루봉의 팔각정자)

산 중에 좋은 친구는 숲속의 새요

세상에서 가장 맑은 소리는 돌 위에 흐르는 물소리다.

 

 종루봉과 망해정 안내 게시판


게시판 내용을 요약하면 신라 말기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 올라 종대봉이라 불렀고, 서해를 바라보며 종은 있으나 울릴 사람이 없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단다. 그러면서도 다시 당나라로 가서 보수가 많은 곳에 취업할까 망설이다가 조국에서 저술과 후학에 힘쓰며 나라를 깨우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 여기고 그 길을 택했다고 한다

  

다음에 <안희두, 광교산에 올라 인생을 묻다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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