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연초만 해도 2020년은 해외여행의 해로 정했었다. 3월에 친족 모임으로 대만, 5월에 아들과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횡단하고 태평양 연안 몇 개 지역도 관광하고 돌아와 틈새 공략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각각 10일씩, 블라디보스톡 5일, 다소 위험하지만 이집트를 보름 정도 계획하고 있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점점 조여오는 불치의 병이 그나마 허락할 때 해외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금방 잡힐 듯하던 코로나19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린다. 해외는커녕 집밖에 나서기도 이제 쉽지 않게 지구촌은 변했다.
수원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다. 그리고 광교산은 엄마의 약손이요, 나의 시혼(詩魂)이다. 새해를 앞두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그래도 가슴에 남아있는 망망한 꿈을 어찌하며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광교산에 물어보고 싶었다.
날이면 날마다 꽃구름 피어나게 서로가 서로를 나보다 위하는 맘 끝없이 울려 퍼지는 곱고 고운 이중창
<시작노트> 신혼 8개월로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왔고 직장도 안동에서 수원으로 옮긴 지 4달째인 1983년 7월 9일 중앙일보 독자시조란에 소개된 필자의 시조다.
광교산을 아무리 가고 싶어도 지금은 솔직히 나 혼자 갈 수는 없다. 교통편이야 택시를 이용한다 해도 같이 등반하며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내에게 광교산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앞으로 가기가 어려울 것 같은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지 흔쾌하게 동행하기로 했다. 아내에겐 무리한 광교산 산행인데 나를 보호해주기 위해 기꺼이 동의했으리라.
중·고등학교 서울 지역 친구들과 월 1회 다니던 서울 인근 산행은 이젠 나에겐 동행에서 추억으로 바뀌었다. 고위험군 환자와 함께 다니다 무슨 봉변을 당할까 친구들의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게 진정한 벗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모두 접었다. 2020년 골프동호회 모임도 모두 탈퇴했다.
화장실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고 심재덕 회장이다. 민선1·2대 수원시장이요, 제17대 국회의원이며, 세계화장실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분이다. 1988년 11월부터 수원문화원이 발간하는 월간 『수원사랑』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수원문화원 심재덕 원장님을 자주 뵈었다. 나는 수원 화성행궁 복원 발기인에도 참여했고, 연날리기 대회, 5월 5일 수원화성성곽 순례, 한여름 밤의 음악제 등등 수원문화원이 주관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반딧불이화장실을 떠나 급경사를 오르는데 전화가 온다. 아내다. <대상> 명패와 화장실 내부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같이 가자고 내가 약속을 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렸다. 사진을 찍고 나니 아내가 저 앞에 먼저 올라가 빨리 오라고 손을 흔든다. 혼자 앞서가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알았다고 손을 흔들며 출발했다. 그런데 아내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내가 무슨 옷을 입고 왔던가 떠올려봐도 배낭을 메었다는 것 외에 생각나지 않는다. 엉뚱한 사람을 아내로 착각한 것이다.
지난 10월 말 서울 덕수궁에 가던 날도 그랬다. 도로 중간 공사장에서 덕수궁 대한문을 사진 찍다가 횡단보도 신호가 끝나가는 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갑자기 고함에 뒤를 돌아보니 아내가 뒤에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엉뚱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여 종종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1981년 사립인 안동 A고교에서 근무하다 결혼 후 수원 B고교로 옮겼고, 1990년 3월 사립학교에서 공립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C중학교에서 평교사협의회를 이끌면서 교육 현장연구에 눈을 떴다. 월간 『우리교육』에 다양하고 흥미로우며 새로운 학습 방법을 제시했고, EBS-TV에도 출연하였다. 또한 <EBS-TV 중1수학> 영상제작에 자문교사와 <EBS-TV 중2수학> 교재 집필진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KBS 발행 중학생용 월간 『열린 생각 좋은 글』에 수학 역사 이야기를 1년간 연재하였다. 1994년부터 경기도교육청 교과협의회가 내 삶의 전부인 양 시간을 쏟아부어 여기저기 강연은 물론 각종 연구와 우수아 및 실업계 수학지도 자료집 집필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그때 그 자료들은 <표지와 내가 쓴 원고>만 별도로 떼어서 보관하고, 나머지는 2년 전에야 버렸다. 라면상자로 20박스가 넘는다. 그랬어도 책장 3개 정도 줄어들었지 별로 변한 게 없다. 옛날 인쇄용지를 작성할 때 원안지 밑에 놓던 철판(흔히 가리방)에서 한글 타자기, CD, 대용량 외장용 하드 등등, 아니 교단을 출발할 때부터 학생들에게 받은 편지는 물론 쪽지, 모둠일기 등 30년 이상 간직해 온 것들을 새해엔 진달래 꽃바람에 띄워 버리려고 한다.
맨발로 기다리다 예까지 뛰어왔나 상기된 붉은 얼굴 방긋 웃다 떨구누나 온 산이 붉게 타오른다 열여덟 살 순이다
<시작노트> 20여 년 전 반디불이화장실 쪽에서 형제봉을 오르다 얻은 필자의 시조이다.
어느덧 형제봉에 가까워진다. 형제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데 아내가 생략하자고 할까봐 걱정이었다. 산의 정기를 받으려면 바위산을 올라가야 하는데, 오늘부터 걱정한 것도 아니다. 2주 전 광교산에 가자고 제안할 때부터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와보니 형제봉 정상인 바위에 오르며 잡았던 밧줄은 남아있지만, 옆구리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중앙에 큰 글씨로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 오른쪽에는 작은 글씨로 ‘병자청란공제호남병(丙子淸乨公提湖南兵)’, 왼쪽에는 ‘근왕지차살청삼대장(覲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고 쓰여 있단다. (https://blog.naver.com/damool38/221330710572인용)
힘들어도 아내와 같이 참배하였다. 누군가 이곳에 올라와서 깨끗이 쓸던 빗자루만 쓸쓸히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 70여 m를 되돌아 비로봉(해발 488m)으로 올라갔다.
다음에 <안희두, 광교산에 올라 인생을 묻다2>로 이어집니다. <저작권자 ⓒ 수원인터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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