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창덕궁 탐방 2. 비단물이 흘렀던 금천교에서 인정전까지

정흥교 | 기사입력 2020/11/25 [18:49]

안희두 창덕궁 탐방 2. 비단물이 흘렀던 금천교에서 인정전까지

정흥교 | 입력 : 2020/11/25 [18:49]

 


4. 금천교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 궐 안으로 들어가려면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길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한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錦川)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른다.’ 하여 붙여졌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간다. 창덕궁 금천교(錦川橋 보물:1762)는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한 축조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가치가 뛰어나다.

 

 금천교를 지켜온 수호신인 듯(금천교 건너편 좌측)


금천교는 1411(태종 11) 3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 위에 설치되어 있다.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으며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윗면은 길이 12.9m, 너비 12.5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두 개의 홍예로 이루어진 교각의 남쪽에는 해태상, 북쪽에는 거북이상이 있다. 조각상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이 아니다. 잡된 귀신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기에 관광객과 상관없이 다리 아래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했다.  

 

 금천교 북쪽 홍예와 거북이상. 난간석 아래에 귀면이 4개 있고 두 홍예가 만나는 거북이상 바로 위 역삼각형에도 귀면이 있다.


5대 궁에는 금천에 다리가 모두 있는데 이름은 다르다. 창덕궁은 금천교(錦川橋), 경복궁은 영제교(永濟橋), 창경궁은 옥천교(玉川橋), 덕수궁은 금천교(禁川橋), 경희궁은 금천교(錦川橋)이다. 창덕궁 금천교 밑에는 원래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일본강점기 때 물길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금천교 난간석 위에 익살스럽게 세워져 있는 동물을 나티라고 하는데 궁궐 입구에서 재난과 악귀를 막아준다고 한다.

 

금천교 석상들보다 더 금천교를 지키는 수호신은 금천교를 향하며 발 뻗은 느티나무였다. 관심 있게 보지 않았는데, 연리지도 있단다. 같은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으면 연리지라 부르고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로 붙으면 연리목이라 부른단다.

 

 금천교 남쪽에 귀면과 해태상


5-1 진선문

 

진선문(進善門)은 대문인 돈화문(敦化門)과 인정문 사이의 중대문으로 창덕궁 정전(正殿)인 인정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411(태종 11) 건립하였다. 진선문을 지나면 사다리꼴인 사각형의 넓은 공간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가는 인정문(仁政門)이 있고, 곧바로 가면 후원으로 가는 길로 숙장문(肅章門)이 있다.

 

  진선문

 

태종은 진선문에 신문고를 설치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1771년 영조가 다시 설치하였고 신문고를 치는 절차도 명문화했다. 그렇지만 절차도 복잡한데다, 병사들이 지키는 돈화문을 통과해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까지 가서 신문고를 친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왕의 행차를 가로막는 일이 종종 일어나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었단다.

      

청와대의 국민청원

새로운 신문고라

무관심한 이웃들 SNS로 일깨우며

문제만

실컷 뿌려놓았다

사리는 언제 줍나?

 

 좌측이 인정문, 정면이 숙장문, 오른쪽에 상서원, 호위청, 내병조 편액이 있다.


1908년 일본인들은 창덕궁을 수리한답시고 진선문과 안쪽 모든 시설을 헐고 인정전 남쪽 행랑까지 왜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지금은 <동궐도> 그림을 통해서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헐린 지 90여년만에 복원을 착수하여 1999년 완공하였다. 진선문에는 처마 마루마다 잡상이 다섯 개씩 있다. 돈화문은 일곱 개, 인정전에는 아홉 개씩 있다.  

 

 창덕궁 인정전 일원 구글 지도


5-2 인정문

 

인정문(仁政門:보물제 813)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仁政殿:국보 제225)의 정문으로 1405(태종 5)에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년에 재건하였다. 영조 20(1744) 10월 승정원 화재 때 좌우 행각과 함께 소실되어 이듬해 3월에 재건되었다. 순조 3(1803) 12월에 선정전 서행각에서 불이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하였는데, 그때 인정문도 재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 홍보 전시장으로 개조하여 훼손되어 1995년에 복원해 놓았다.

 

 인정문 안으로 인정전이 보인다.


인정문은 삼문이며 단층이다. 문 좌우로 행각이 있고 동행각엔 광범문이, 서행각에는 숭정문이 있어 보통 때 문무백관들이 출입하였다. 인정문과 그 옆 회랑은 일제강점기 홍보 전시장으로 개조하여 많은 건축물을 훼손하였으나, 1995년에 복원해 놓았다. 그리고 지붕 꼭대기 용마루에 붙은 자두꽃 문양은 왜색이 아니라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한단다.

 

효종, 현종, 숙종. 영조, 고종, 순조 등은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마치고 정전인 인정전의 왕좌에 올랐다. 자 이제 독자님들도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하고 왕의 마음으로 인정전부터 거닐어 보길 바란다.

 

 인정전


인정문을 들어서면 인정전 앞뜰이 펼쳐지는데, 3도가 힘차게 뻗어있고 양쪽엔 품계석이 열을 맞춰 서 있다. 박석은 경복궁에 비해 잘 다듬어져 있다. 인정전으로 오르는 답도에는 구름 속에서 봉황이 노니는 형상이다. 봉황은 성군이 나타나거나, 성군이 다스리고 있음을 의미한단다. 선정을 베풀겠다는 왕의 의지를 드러낸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5-3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용상과 일월오봉도, 뒷면은 유리창이다.

 

인정전은 1405(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 재건했다. 또한 1803(순조 3)에 소실되었는데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그리고 1908년 일본인들이 인정전 남쪽 외행각 일원을 왜색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단다

 

 천정에 전구가 이채롭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인정전이지만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천장은 높다. 바닥은 원래 전돌을 깔았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 있다. 1908년 인정전은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서양식으로 개조하였다. 전등은 마귀할멈 같았는데 다시 보니 대한제국의 상징인 자두꽃 같다. 자두꽃은 우리말로 대한제국을 상징한다.

  

 상단부분에 봉황이 나는 모습 일부가 보인다.

 

건물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인정전의 앞에는 '드므'4개 놓여있다. 드므는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이란다. 조선시대에는 언제 생길지 모르는 화재에 대비해서 드므에 물을 항상 담아두었다고 한다.

 

 

날아갈 듯한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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