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 궐 안으로 들어가려면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길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한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錦川)은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른다.’ 하여 붙여졌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간다. 창덕궁 금천교(錦川橋 보물:제1762호)는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한 축조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가치가 뛰어나다.
금천교 석상들보다 더 금천교를 지키는 수호신은 금천교를 향하며 발 뻗은 느티나무였다. 관심 있게 보지 않았는데, 연리지도 있단다. 같은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으면 연리지라 부르고 서로 다른 나무가 하나로 붙으면 연리목이라 부른단다.
진선문(進善門)은 대문인 돈화문(敦化門)과 인정문 사이의 중대문으로 창덕궁 정전(正殿)인 인정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411년(태종 11년) 건립하였다. 진선문을 지나면 사다리꼴인 사각형의 넓은 공간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가는 인정문(仁政門)이 있고, 곧바로 가면 후원으로 가는 길로 숙장문(肅章門)이 있다.
태종은 진선문에 신문고를 설치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1771년 영조가 다시 설치하였고 신문고를 치는 절차도 명문화했다. 그렇지만 절차도 복잡한데다, 병사들이 지키는 돈화문을 통과해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까지 가서 신문고를 친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왕의 행차를 가로막는 일이 종종 일어나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었단다.
청와대의 국민청원 새로운 신문고라 무관심한 이웃들 SNS로 일깨우며 문제만 실컷 뿌려놓았다 사리는 언제 줍나?
인정문(仁政門:보물제 813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仁政殿:국보 제225호)의 정문으로 1405년(태종 5년)에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년에 재건하였다. 영조 20년(1744) 10월 승정원 화재 때 좌우 행각과 함께 소실되어 이듬해 3월에 재건되었다. 순조 3년(1803) 12월에 선정전 서행각에서 불이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하였는데, 그때 인정문도 재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 홍보 전시장으로 개조하여 훼손되어 1995년에 복원해 놓았다.
효종, 현종, 숙종. 영조, 고종, 순조 등은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마치고 정전인 인정전의 왕좌에 올랐다. 자 이제 독자님들도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하고 왕의 마음으로 인정전부터 거닐어 보길 바란다.
5-3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인정전은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 재건했다. 또한 1803년(순조 3년)에 소실되었는데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그리고 1908년 일본인들이 인정전 남쪽 외행각 일원을 왜색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단다.
건물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인정전의 앞에는 '드므'가 4개 놓여있다. 드므는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이란다. 조선시대에는 언제 생길지 모르는 화재에 대비해서 드므에 물을 항상 담아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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