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두 창덕궁 탐방 1 창덕궁 개요와 돈화문을 비롯한 성문들

정흥교 | 기사입력 2020/11/18 [12:16]

안희두 창덕궁 탐방 1 창덕궁 개요와 돈화문을 비롯한 성문들

정흥교 | 입력 : 2020/11/18 [12:16]

 


1. 창덕궁에 가기까지

 

경복궁은 예전에 여러 차례 다녀갔으나 기억을 차곡차곡 꺼낼 수 없었다고 했다. 14번 연재되는 동안 4번을 더 다녀왔다. 그래도 글쓰기가 낯설었는데,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은 예전에 잘해야 2번 가지 않았을까 싶다. 창덕궁 후원의 탐방 흔적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해설을 들으며 졸졸졸 따라다녀야 했던 기억이 난다.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갔었는데, 전에 어느 모임에서 단체로 왔다가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함께 오지 않았나 한다. 창덕궁 후원도 창경궁으로 갔었다면 이번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지난 2020414일 창덕궁과 후원 그리고 창경궁을 다녀왔다. 반년 만에 글을 쓰려고 정리하다 보니 뒤엉켜 1014일 다시 찾았다. 마침 코로나19 단계가 낮아져 문화해설사가 동행한다기에 반가웠다. 830분경 도착했는데, ‘통합관람지원센터공사로 밀려났던 돈화문 매표소가 장막을 걷어내고 새 건물로 이주를 했다. 오늘은 구름 낀 차가운 날씨에다 바람까지 불어 썰렁한데 미리 문을 열어주는 아량은 없었다. 9시경 표를 구입하며 문화해설에 관해서 두 번이나 창구에 문의했는데 대꾸가 없었다. 500원짜리 창덕궁 해설집을 파는 창구에서 1권을 구입하며 물어보니 표를 받는 곳 안쪽에서 횟수당 선착순 20명이란다.

 

 돈화문 앞쪽(전면이 5칸인데 양쪽 한 칸씩은 막혀있다.

 

 양쪽 문은 문이 아닌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밖에선 5문이요

안에는 3문이라

들락날락 물음표

던지고 당겨봐도

온몸이 마구니란다

죽어야 마땅하다

 

창덕궁에 입장하면서 해설사에 대해 물어보니 모른단다. 난처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 아내와 일단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시간이 흘러 930분부터 해설을 한단다. 지난번 육상궁에선 관람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접수가 되었는데, 무조건 930분에 선착순이라니 다른데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920분경 안내방송도 두어 번 나왔고 손목에 차는 띠를 나누어 주었다. 5명이다. 코로나19로 해설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첫날이라 혼선이 일어난 것 같았다.

 

 창덕궁 무료해설 출발장소 안내판


글을 쓸 때 보통 문화해설을 참고하는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설명하기에 큰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 들으면 궁금해서 생각이 막힌다. 이번 창덕궁 이야기는 돈화문에서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으로 해서 대조전, 성정각, 낙선재, 그리고 해설사가 개별 관람을 하라며 생략한 선원전과 궐내각사 순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창덕궁에도 쪽문이 있나? 관람 후 출구인데, 창덕궁의 서문인 금호문이다. 그보다 기계체조하는 느티나무가 관심을 끌었다. 창덕궁 안에 느티나무 고목이 30여 그루 있단다.


광화문과 돈화문 영추문과 경추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덕궁 세웠어도

허접한 성벽이나 성문

서산을 넘는구나  

 

2. 창덕궁 개요

 

조선의 창업 군주 태조 이성계는 1392717(제헌절 유래) 조선을 건국했다. 고려왕조가 자리를 잡았던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은 고려의 정전인데, 신하들에 떠밀려 입장을 했고, 서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은 후 즉위 연설을 했단다. 물론 이때 건네받은 국새도 고려의 것이고, 축하음악이나 축하사절도 없었다고 한다.

 

 창덕궁 남서쪽 일원 구글지도


태조 이성계는 1395(태조 4) 한양에 390여 칸의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을 짓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단출하게 즉위식을 가진 후 개성으로 도읍지를 옮겨갔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으로 태종은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태종은 1405(태종 5) 10월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건립했다. 창건시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외전 74, 내전 118칸이었는데,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인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단다. 그리고 이듬해 한양으로 환도했는데,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입주했다.

 

이때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궁궐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1411(태종 11) 금천교를 만들었고, 1412(태종 12)에는 돈화문을 건립했다. 또한 태종은 140662천평으로 창덕궁의 후원을 조성했는데, 세조는 1463(세조 9) 후원을 더 넓혀 15만평의 규모로 크게 확장하였다.

 

세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 수강궁을 지었는데, 성종은 1484(성종 15) 수강궁 자리에 새로이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계 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7(선조 40)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1613(광해 5)에 공사가 끝났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 정궁으로 사용하여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조선의 법궁이었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임금들이 거처했던 곳이고,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해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1623년의 인조반정 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궁궐전각이 소실되었다가 1647(인조 25)에 복구되었다. 반정군에 쫓기던 광해군은 자신이 재건한 아름다운 궁궐이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비참하고 허무했을까. 1803(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시작된 화재가 인정전을 비롯한 내전의 상당 부분을 불태웠고, 곧 재건되었다.

 

창덕궁의 대화재는 191711월에 일어나 내전 영역 대부분을 불태웠다. 복구공사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의 전각을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원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자동차 차고와 전등, 탁자, 의자, 커튼 등 근대식 설비와 가구의 도입으로 건축의 면모도 바꾸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왕실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고의로 궁궐을 파손했고, 그 결과로 지금처럼 빈 공간이 많은 썰렁한 궁궐로 남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은 창덕궁의 낙선재 영역에서 마지막까지 거주했다.

 

특히 동궐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1826~ 1828년경)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동궐도(국보 제249)는 크기가 가로 576, 세로 273로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다. 이 그림은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창덕궁은 1991년부터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예전의 10% 정도에 불구하지만 조선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그래도 원형이 잘 보존된 궁궐이란다.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26~ 1828년경으로 추정되는 동궐도(국보 제249)안내판 사진


5대 궁궐은 조선왕조의 왕실이었으며, 국정이 이루어지는 정치의 심장부였다. 그래서 궁궐을 탐방할 때는 삼간(三間)을 생각하란다. 직접 가서 공간(空間)을 거닐며, 시간(時間)을 거슬러 그 당시의 모습을 추측해보고, 끝으로 人間(인간), 어떤 사람들이 그곳에서 생활했는지 그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지를 상상해보면 궁궐을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나라고 귀띔한다.  

 

3-1 돈화문(敦化門)

 

1412(태종 12)에 건립한 돈화문(敦化門:보물 383)은 창덕궁의 정문인데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여기서 돈화(敦化)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이란다. 돈화문은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으로써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나 의례가 있을 때만의 출입문이었고 평소에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현재 관람 후 나가는 길)으로 드나들었다. 그리고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정오에 북을 치고,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28번 울리며, 해제 시간에는 종을 33번 쳤다고 한다.

 

 굳게 닫힌 돈화문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전소되었다가 1609(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란다. 돈화문은 5칸인데 황제가 있는 중국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문제가 되자 좌우 2칸을 2층으로 오르는 계단실로 바꾸고 3칸만 대문으로 사용하여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돈화문 일원 (창덕궁 안내 소책자)


3-2 금호문(金虎門)

 

금호문은 창덕궁의 서문(西門)이다. 서쪽은 음양오행으로 금()이고 동물로 호랑이()라 금호문이라 칭하였단다. 정문인 돈화문이 임금과 외국 사신, 사헌부 대사헌 등이 출입했던 문이라면 금호문은 승정원의 승지나 홍문관 등 궁내 관서에 근무하는 벼슬아치들이 출입했던 문이다. 표를 구입하러 갔다가 창덕궁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출근하는 것 같아 창덕궁의 쪽문인가 했더니 예전부터 있었던 금호문이다. 오늘날 금호문은 창덕궁 관람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나가는 문이다.

 

금호문은 1926428일 순종황제의 성복제(成服祭)에 참석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사토(齋藤實)를 송학선 의사가 암살하려다 실패한 '금호문 의거'의 현장이기도 하다. 송학선 의사는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26년 순종이 서거하자마자 조선총독부는 창덕궁 남쪽에 도로를 뚫어서 종묘와 창덕궁을 갈라놓았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은 이 공사를 끝까지 반대했고, 조선총독부는 공사를 단행하여 조선의 신성한 공간인 종묘의 허리를 잘라버렸다.  

 

3-3 그밖에 성문들

 

단봉문(丹鳳門)은 창덕궁의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문으로 주로 평민층이 이용했던 문이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상궁 차림으로 변복하고 단봉문을 빠져나가 장호원에 있던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요금문(曜金門)은 창덕궁 서쪽 담장에 궁녀들이 드나들던 문으로 내시나 궁녀가 늙고 병들면 떠났던 문이란다.

건무문(建武門)은 창덕궁의 북쪽 궁문으로 경복궁의 신무문과 비슷한 개념, 건무문 밖은 성균관대학교 운동장이라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렵단다. 갑신정변 당시 창덕궁에 있던 고종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개화당이 수세에 몰리자 명성황후가 있는 북관종묘(北關宗廟)로 이동할 때 고종이 빠져나갔던 문이 바로 건무문인데, 정변을 주도했던 홍영식과 박영교가 고종을 호위하다가 피살된 곳이란다.

경추문(景秋門) : 창덕궁의 서문으로 되어 있으나 역할을 금호문이 대신해왔다.

 

궁궐의 4대문은 동쪽은 춘(), 서쪽은 추(), 남쪽은 화(), 북쪽은 무()를 넣어 이름 지었다. 창덕궁에선 영춘문, 경추문, 돈화문, 건무문이고 경복궁에선 건춘문, 영추문, 광화문, 신무문이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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